지난 연재에서 중세의 가구(家口)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대략적으로 보았다. 중세의 이런 가족 구성원들의 형태와 기능은 당연하지만 거주지와도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이번엔 중세의 성에 대해서 살펴보자.
성(城)이나 기사는 중세 유럽의 상징으로,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유럽의 성은 대개가 아래와 같은 모습이다.
위의 사진은 신데렐라 성의 모델이 된 노이슈반슈타인(Neuschwanstein) 성으로, 아마 오늘날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유명한 성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사실 1886년, 즉 19세기 말에 지어진 성이다. 이 시기는 유럽인들도 정확한 과거의 고증을 모른 채로 '신화적인 판타지'에 둘러싸여서 성을 떠올리던 시기였다.
중세에는 당연히 노이슈반슈타인 성처럼 전투가 아닌 목적을 지닌 성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로맨틱한 중세 성의 이미지를 바로 잡기 위해서, 먼저 성이란 물건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겠다.
1. 동양과 유럽의 성(castle)
(1-1) 다른 지역의 성들
성(城)이라는 구조물은 고대부터 거의 전 지역에 존재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개척되지 않은 자연에 둘러싸여 맹수들과 적의 공격에서 안전을 보장 받으려면, 당연히 울타리를 둘러야 하고, 그 울타리는 크고 강할수록 좋을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을 비롯한 굉장히 많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가, 마을이나 도시 전체를 둘러싼 성벽이다. 고을 읍(邑)자를 써서 '읍성(邑城)'이라고 부르는데, 지금의 서울에도 성벽으로 둘러싸였던 흔적인 한양도성(漢陽都城)과 출입문이 남아 있다.
이미지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6%91%EB%8F%84%EC%84%B1
낙산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전경과 한양도성 낙산구간 by KO BYUNGSUK, CC BY-SA 4.0
한양도성
또한 지배자가 사는 거주지 역시 보통 궁궐(palace)이란 식의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중국이나 한국을 보면 거대한 궁궐 터를 성벽으로 두르고서, 그 안에 주거지나 행정을 위한 건물들을 여러 채 지어서 모아둔 것을 볼 수 있다. 경복궁이나 자금성처럼 말이다.
멋 모르고 들어가면 3면에서 공격받는 구조로 되어 있는 자금성의 내문.
자금성은 높은 성벽 뿐 아니라 내부에도 방어를 생각하고 설계한 구조가 보인다.
유럽 역시 중세 이전의 시대, 즉 로마 제국 시대 때 이미 이런 형태의 성벽 도시나 군사 요새는 존재했다.
(1-2) 중세 유럽의 성
그런 이전 시대에 비해서 10세기 무렵부터의 유럽의 성은 굉장히 독특한 형태로 발전했는데, 거주를 하기 위한 주택이나 도시를 성벽으로 두른 형태가 아니라, 개인이 거주하는 건물 자체가 방어에 특화된 요새로 발전한 것이다. 아니, 반대로 전투를 위한 방어 요새에 억지로 들어가서 살기 시작했다는 쪽이 맞을지도 모른다.
영국의 포트체스터 성.시대와 함께 어느 정도 리모델링됐다.
위의 사진의 건물이 영주가 살던 메인 건물(keep)이다.
중세 유럽의 성은 요새화 된 한 채, 혹은 몇 채의 방어 건물이 그 자체로 개인의 주거지가 된 형태였다. 이런 방식은 지중해 인근 문화권을 제외하면 전 세계적으로 일본 정도에나 있는 매우 드문 형태이다.
큰 규모의 성벽은 대군이 머물러야 방어가 가능하지만, 중세 유럽식 소규모 성은 매우 적은 숫자의 병사로도 상당히 많은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 굉장히 효율적인 구조였다. 물론 여기엔 중세 유럽의 군대 규모가 중국처럼 크지 않았다는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방어측만이 아니라 공격측도 말이다.
하지만 작은 요새 안에 주거지를 틀다 보니, 성 안은 어둡고 살기에 매우 불편했다. 왜 이런 성에 살기 시작한 걸까? 이전 시대까지는 훨씬 살기 좋은 저택과 궁전이 있었는데 말이다.
2. 봉건제도와 외적의 침입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유럽에는 이미 고대부터 성벽이란 개념은 존재했다. 중세 유럽식 성에 영향을 끼친 건축 기술은 여러 예가 언급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로마 시대의 군사 요새나 성벽이다.
성을 뜻하는 캐슬(castle)의 어원부터가 라틴어 카스트라(castra)인데, 로마 시대의 군사 요새를 부르던 말이었다. 실제로 중세 때 로마 요새의 유적을 이용해서 성을 만든 경우도 존재한다.
결국 요새나 성벽과 같은 구조물은 과거부터 존재했는데, 왜 10세기 전후로 '개인이 사는 요새 주거지' 같은 특이한 형태의 건물이 등장했을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몇 가지 설이 있다.
그 중 중세 유럽식 성이 시작된 이유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외적의 침입이다.
유럽은 8세기 말부터 북쪽의 바이킹의 침략을 받는 동시에, 10세기부터는 남쪽의 사라센의 약탈과 동쪽의 마자르족의 약탈을 동시에 겪었다. 동서남북 전역에서 이민족의 침략을 받으면서 유럽의 중심부까지도 약탈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시기는 서유럽을 제패했던 프랑크 제국이 붕괴(843)해서 셋으로 나뉜 혼란기였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졌고, 왕의 신하였던 자들은 독립하여 스스로가 땅의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각 지역이 조각들로 나뉘어서 작은 지배자들이 가득해졌다.
중앙의 힘이 부족했기에 각 지역은 스스로 생존해야 했고, 지역의 지배자들은 자신의 거주지를 요새로 만들어서 방어해야 했다. 모두가 자신의 영역을 지배하며 각자도생하는 시대가 열리니 본격적인 중세 봉건제의 시작이었다.
물론 프랑크는 애초에 지방분권적 성격을 띤 국가였고, 외적의 침입이란 이유 하나 때문에 봉건제도가 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외적의 침입은 봉건제도를 가속화시키고 강화시켰으며, 성의 보급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3. 모트(motte)와 베일리(bailey)
이렇게 퍼져나간 '개인 거주 요새'인 유럽의 성은 '모트와 베일리(motte and bailey)'라는 형태로 시작했다.
모트(motte)는 언덕이라는 뜻이고, 베일리(bailey)는 요새화되었다는 뜻이다. 모트와 베일리는 '언덕'과 '울타리나 벽으로 둘러싸인 땅'을 말하는데, 중세 유럽 성의 초기 형태였다.
경사진 높은 언덕(모트)은 적이 올라오기 힘들고 싸우기 유리하며, 주위를 감시하기도 용이하다. 그 위에 울타리를 두른 탑을 짓고서 주거지로 삼는다. 언덕은 기존의 지형을 이용하거나 주위의 땅을 파서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배자(영주)가 사는 주거지가 3층쯤 되는 탑이라 해도 병사를 포함한 다수가 살기는 어려울 뿐 아니라, 영구적으로 거주하기 위한 다양한 시설을 모두 넣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울타리로 둘러싸인 안뜰(베일리)이다. 언덕의 아래 공터에 울타리를 두르고 마굿간이나 병사의 생활 공간 등 추가적인 시설을 지었다. 뜰의 안에서 작은 규모의 경작을 할 수도 있었다.
언덕을 만들 때 사용할 흙은 안뜰의 울타리 주변의 땅을 파서 충당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둥근 구덩이인 해자가 생긴다. 대개의 경우 물은 들어 있지 않았다.
이렇게 흙을 파서 쌓는 간단한 토목 공사와 목재를 이용해서 만든 울타리와 탑이 유럽식 성의 시작인 '모트와 베일리'였다. 상당히 빠른 시간 안에 만들 수 있는 것에 비해 굉장히 높은 방어력을 지닌 요새였다.
모트와 베일리는 바이킹에게 배운 방식의 요새라는 말도 있지만 정확한 기원은 알지 못한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런 종류의 성이 9~10세기 무렵 등장해서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는 것이다. 11세기에는 모든 지역에서 흔하게 되었고, 12세기에는 수천 개가 넘는 성이 각지에 세워졌다.
이미지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Windsor_Castle
Aerial view of Windsor Castle from the south by Cmglee, CC BY-SA 4.0
영국 왕실의 윈저 성(Windsor Castle).
중앙 언덕(모트)의 둥근 탑과 좌우로 늘어선 부지(베일리)에 세워진 건물, 그를 둘러싼 벽을 볼 수 있다.
모트 앤 베일리의 형태를 간직한 전형적인 유럽식 성이다.
(물론 위 사진의 건물들은 대부분 세월과 함께 현대 건물로 리모델링 됐다)
4. 주거를 위한 탑 : 킵(keep)과 돈존(donjon)
언덕의 위에는 지배자를 위한 메인 주거지인 탑이 존재했다. 초기에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으나 프랑스쪽에서는 이 건물을 훗날 돈존(donjon)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오늘날 게임에서 말하는 '던전'의 기원이 된 이름이다. 영국에서는 킵(keep)이라고 불렀는데 같은 구조물을 다른 이름으로 불렀을 뿐이다.
돈존(donjon)은 라틴어 도미누스(dominus)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배자'란 뜻이고, 킵(keep)은 바구니나 통을 의미하는 kype에서 유래했다. 영한사전에서 keep은 '아성(牙城)'이란 뜻으로 나와 있는데, 보통 중세의 성에 대한 책에서 학자들은 그냥 탑(tower)이라고 부른다.
※ 아성 : [명사] 1.아기(牙旗)를 세운 성이라는 뜻으로, 주장(主將)이 거처하는 성을 이르던 말. (출처 : 표준국어대사전)
성의 주탑은 지배자의 생활 공간이었고, 최후의 방어 요새였으며, 시간이 흐르며 다양한 시설이 합쳐진 복합 건물이 되어 갔다.
우리가 흔히 '중세의 성'이라고 부르는 구조물의 중심은 바로 언덕 위에 세워진 이 탑을 이야기한다. '주거지로서의 성'이란 주제에서 핵심이 되는 구조물이다.
1067년 정복왕 윌리엄이 런던에 세운 화이트 타워(Tower of London).
5. 본격적인 중세 유럽의 성으로...
성의 시작은 외적의 침입에 큰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그 이후로는 군사적 사회적 기능을 인정받으며 사회 안정기에도 빠르게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11세기 무렵 빠르게 확산된 초기 성은 시간이 지나며 나무 대신 돌로 만드는 방식이 기본으로 자리잡는다. 12세기에는 석조 성이 매우 빠르게 늘어나고 결국 성의 기본적인 소재가 되었다. 또한 십자군 원정을 다녀온 역전의 용사들은 전쟁의 경험을 기반으로 유럽의 성을 개량해 나갔다.
중앙에는 거대한 석조 탑이 있고 그 주위를 석벽인 커튼월(curtain wall)로 둘렀으며, 성의 사각지대나 벽에도 일정 간격으로 탑(corner tower나 flanking tower)이 세워졌다. 군데군데 돌출된 망루(turret)가 세워지고, 도개교가 등장했으며, 성문에는 작은 요새(barbican)가 세워졌다.
14세기에 세워진 영국의 보디엄 성(Bodiam Castle).
전투를 위해 작게 낸 창을 보면 채광이 얼마나 안 좋았을지를 예상할 수 있다.
이렇게 완성된 거대한 방어 거주지는 지배자의 부와 힘, 그리고 위엄을 상징하게 되었으며, 적은 병력으로도 큰 병력을 대단히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중세의 무기 수준에선 물리적인 공격으로는 거의 함락이 불가능한 종류의 철옹성들이 실존했고, 영주들은 '원칙적'으로는 성을 짓기 위해서 왕이나 황제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유럽 성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전투와 방어를 위한 시설이었다. 성의 구성원, 즉 영주의 가구(household)는 영주 본인부터 하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기본적으로 전투원이었다.
하지만 전투를 위한 성은 상당히 먼 훗날의 연재에서 다룰 것이다. 이제 다음 편에서는 거주지로서의 성, 생활 공간으로서의 성을 살펴 보도록 하겠다.
▶[거주지로서의 중세 유럽의 성 (2) : 주거 공간과 그레이트 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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