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000년이란 시간과 중세 유럽
보통 중세라는 표현은 옛날의 언젠가를 대충 뭉뚱그려서 말할 때가 많다. 정확히 말하면 유럽의 중세는 역사에서 보통 로마 제국의 멸망(서기 476년)부터 동로마의 멸망(서기 1453년)까지의 약 1000년을 말한다. 그 중 흔히 창작물에 등장하는 '중세 같은 중세'는 843년 프랑크왕국 분열 즈음부터 시작되는데, 그렇다해도 600년에 이르는 긴 기간이다.
세상의 모든 건 시간과 함께 변한다. 유럽 중세는 한반도의 삼국시대에 시작해서 조선시대에 끝난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넓은 땅 수많은 나라에서 완전히 같은 법, 같은 규칙, 같은 문화를 갖고 있었을 수는 없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현대 한국 내에서만 해도 지역 색이나 지역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가. 유럽은 러시아를 빼도 한국보다 100배나 넓은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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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모든 귀족 작위 체계가 공후백자남 오등작으로 귀결된다는 건 너무 편리하고 지나친 비약이다. 이 말은 수백 개의 국가에서 600~1000년 동안 똑같은 작위 체계가 변함없이 유지됐다는 전제가 깔린 것이니까. 작위는 중세 시대에도 계속 변했고, 중세 이후에도 계속 변했다는 걸 기억해 주시면 좋겠다.
2. 유럽의 봉건제(feudal system)
중세는 봉건제 국가였다. 중앙집권적 왕국이 아니었다.
중세의 왕은 왕국의 주인이었지만 신하들을 찍어누를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없었다. 힘이란 건 결국 군대에서 나온다. 대규모의 군대를 만들고 유지하려면 넓은 영토와 막대한 자원이 필요하다. 문제는 중세라는 시대에는 중앙 정부가 넓은 땅을 관리하고 다스릴 수 있는 행정력이 없었다. 화폐 경제가 없었기에 신하의 봉급으로 줄 돈도 없었다.
모이면 강해지고 흩어지면 약해져서 다른 강자에게 먹히게 된다. 그래서 모여야 하는데, 막상 모이면 신하에게 줄 수 있는 콩고물이 없다. 그러다보니 왕은 신하에게 충성의 대가로 영지를 줬다. "난 너에게 줄 게 없어. 그러니 땅을 줄게. 알아서 해 먹는 대신에 필요할 때 군대와 돈(생산물)을 보내야 해?" 라고 계약을 맺고 나눠준 게 영지다.
결국 이게 중세의 귀족과 기사의 탄생이다.
왕을 중심으로 각지의 영주들의 연합군을 만들어 내기 위한 시스템.
서로 상대에 대한 의무가 있는 관계라고 해서 쌍무적 계약관계라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힘이란 건 땅과 군대에서 나오는데, 그 근원이 되는 땅을 나눠주니 왕은 그만큼 약해지고, 신하는 강해진다는 거다. 스스로 영토와 군대를 다스릴 능력은 없는데, 영토를 나눠주면 본인이 약해지는 딜레마의 시대가 바로 중세다.
이렇다 보니 당시의 영주들은 왕의 말을 잘 듣는 신하같은 게 아니었다. 왕과 끝없이 다투며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경쟁자였다. 나라 전체가 통일되어 돌아가는 게 아니라 각 지역이 모자이크처럼 중구난방으로 각자도생했다. 중세의 장원제를 보면, 각각의 행정구역이 모두 자급자족을 하며 알아서 살았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국가'라기보다는 '영지들이 모여 있는 집합체'에 가까웠던 것이다
3. 영지(fief)와 작위(title)
(3-1) 작위의 기원
그럼 영주가 갖고 있는 작위란 뭘까? 작위의 기원은 크게 두 가지다.
(1) 옛 왕국의 시스템에 속하던 관직이 작위로 변했다.
(2) 어떤 땅의 주인임을 증명하는 이름(title)이다.
우리가 말하는 중세는 그에 앞서서 두 번의 붕괴가 있었다. 하나는 476년 로마 제국의 붕괴로, 중앙집권의 강력한 제국이 유럽에서 사라지고 로마시대의 풍요와 시스템을 잃어버렸다. 다른 하나는 843년 샤를마뉴 대제가 넓혀 둔 거대한 프랑크 왕국이 셋으로 쪼개진 것인데, 이후 혼란기가 찾아오면서 판타지에서 나오는 중세 같은 중세의 막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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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초/노랑으로 삼등분 된 프랑크 왕국.
그 놈의 분할 상속...
그 결과 기존의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지역을 통치하던 강력한 관료들이 그대로 통치자로 변하게 됐다. 홀로 살아남을 수 없는 작은 지역의 패자들은 왕이라는 커다란 우산의 아래로 모였다. 왕은 신하들에게 보수로 땅을 떼어 나눠주었다. 이렇게 해서 왕국이란 테두리 안에 수많은 영지들이 생겨났다.
원래 영지라는 건 처음에는 왕이 신하에게 빌려주는 개념이었다. 신하로 있는 동안에 거기서 생활비랑 보수를 알아서 뽑아 먹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영주 가문이 땅에 뿌리를 내렸고, 숫자가 많은 영주들은 왕과 권력을 겨루고 영지를 상속하며 실질적인 주인이 되었다. 세입자들이 담합해서 영구히 눌러앉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초기에는 신하에게서 영지를 다시 찾아오는 게 쉬웠지만, 나중에는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영지는 하나하나가 영주라는 왕을 둔 작은 나라에 가까워졌다.
모든 영토는 원론적으론 왕의 것이다. 원론적으론...
(3-2) 작위에 대한 오해들
그리고 여기서 재미있는 오해들이 생기는데, 귀족의 작위를 결정하는 게 사람이 아니라 땅이라는 거다.
공작령 = 공작이 다스리는 땅 (X)
공작 = 공작령을 다스리는 사람 (○) |
영지는 (주로 크기를 기준으로) 급이 나뉘게 되는데, 각 땅마다 그 땅의 급에 맞는 작위(title)가 붙어 있다. 그래서 영주가 되면 그 땅의 작위로 불리게 된다. 작위라는 건 사람에게 붙은 게 아니라 땅에서 따라오는 것이다. 그래서 판타지 창작물과 실제 귀족을 부르는 법을 보면 이렇게 다르다. 필리스 영지라고 쳐 보자.
| 판타지물 | 저 분은 안톤 필리스 공작이십니다. | | 실제 | 저 분은 필리스의 공작이시고 안돌린의 백작이시며 골른의 백작이신 안톤 각하이십니다. |
* 간단히 말할 경우 가장 높은 작위(title)만 말한다.
중세에 귀족 이름을 부르는 방식에 von, de 같은 of(~의)에 해당하는 말이 들어가는 이유가 이거다. 서양에는 원래 성이 없었는데, 어떤 근거지를 갖고 있다고 설명하는 방식이 성씨처럼 변해간 것이다. 작위가 영지에 붙어 있다 보니, 한 사람이 영지를 여럿 갖고 있으면 작위 또한 여러 개 갖게 된다. 예를 들어 사자왕 리처드는 잉글랜드의 왕이며, 동시에 노르망디의 공작, 멩의 백작, 앙주의 백작, 아키텐의 공작이었다.
또 다른 오해는 왕의 신하인 영주가 영지를 다스리는 걸 보고서, 작위라는 것이 일종의 관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다. 관직이 나중에 작위로 변한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세습화된 귀족 작위란 건 더 이상 관직이나 군사 계급이 아니다. 일종의 명예로운 훈장이자 영지를 다스리는 자로서의 호칭, 귀족으로서의 증명 같은 거랄까. 어떻게 보면 '양반' 같은 신분 사회 계급과 비슷하다.
(3-3) 작위와 귀족의 힘
공후백자남이라는 순서가 꼭 귀족 사이의 힘의 크기나 상하복종관계를 나타내지도 않는다. 유럽 봉건 사회의 충성 서약은 동양처럼 국가라는 큰 틀에 묶이는 게 아니라 충성을 맹세한 한 사람에게 묶이는 것이다. 그리고 동양식의 '충성'이 아니라 서로 조건을 주고 받는 계약에 가깝다.
"니가 나한테 땅을 주면, 그 대신 나는 전쟁이 났을 때 군대를 보내줄게."
이런 관계이다. 그러다보니 계약 사항에 안 들어 있는 건 자신의 군주가 시켜도 안 하며, 심지어 주군을 도와 전쟁을 하는 도중에 올해의 의무 참전 기간이 지났다고 갑자기 자기 영지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계약에 없는 일을 시키려면 자기 봉신한테 굽신거리며 따로 대가를 챙겨줘야 했다. 자기 군주가 시키는 것도 안 하는데 무슨 공후백자남을 따지겠는가. (물론 현실에선 힘이 약하면 굽실거리게 되긴 하지만.)
봉신은 '원칙적'으로는 조건 이외의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봉신에게 유리하게 변했다.
물론 현대에도 충성스러운 사원이 있는 것처럼
개인차는 있을 것이라 본다.
그리고 같은 이름의 작위라도 그 안에 다시 공식적/비공식적으로 급이 나뉘었다. 예컨데 왕이 특권을 인정해 준 매우 강력한 백작이 있는가 하면, 보통의 백작도 있고, 아예 명목상으로 이름만 달고서 조용히 있는 백작도 있다. 강한 백작은 공작만큼 강하고, 약한 백작은 남작보다 약할 수도 있다. 결국 판타지에서 말하는 공후백자남이란 위계 체계는 설정 놀음일 뿐, 실질적으로는 힘에 센 자가 목소리도 커지는 약육강식의 법칙이었다.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말이다.
그렇다보니 현실과 판타지 속의 오등작은 매우 달랐다. 무엇보다도 각 나라 별로 작위의 명칭이 모두 달랐는데, 그건 나라마다 작위가 만들어진 기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작위는 나라마다 달랐고, 시간에 따라 계속 변했다.
이제 중세 시대의 영국과 독일의 작위를 살펴 보겠다. 각 나라별로 작위의 명칭의 뜻과, 기원을 눈여겨 보시면 좋겠다.
* 현대의 영국(UK)과 중세의 잉글랜드는 다르지만, 편의상 그냥 영국이라고 하겠습니다. 독일도요.
4. 영국(England)의 귀족 : 남작(Baron)과 백작(Earl)
영국은 왕이 통치하는 모습을 봉건 사회에서도 제법 잘 유지한 나라다. 왕의 권위가 강했고, 왕의 관료들이 각 지역에서 충분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왕국'에 굉장히 가까운 모습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정복왕 윌리엄이 '모든' 봉신에게 충성 맹세를 받아냈기 때문이다. 이후 영국에선 왕이 봉건제의 꼭대기에 군림하게 됐다. 다른 나라는 이게 안 됐다.
작위 체계에도 이런 모습이 잘 반영되어 있다. 특히 일본은 영국과 매우 친했기 때문에, 대중에게 알려진 중세 유럽의 세부 사항은 영국과 매우 비슷하다.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https://en.wikipedia.org/)
남작(Baron)과 백작(Earl)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한 윌리엄 1세는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하들을 Baron으로 불렀다. Baron은 본래 '군인(soldier)', '고용된 자(servant)'란 뜻으로 오늘날 '남작'이라고 번역되는 영국의 작위이다. 영국에서 본래 Baron은 '귀족'을 의미하는 말이었고, Baronage란 귀족 전체를 뜻하는 말이었다.
Earl은 오늘날 백작이라고 번역되는 영국의 작위명이다. 본래 지도자란 뜻인데, 세금징수권과 재판권을 갖고서 카운티/샤이어라는 행정구역 단위를 총괄하는 관직의 이름이었다. 땅을 다스리는 영주가 아니라, 왕에게 임명돼서 공무를 보는 관리였던 것이다. 이 직함은 시간이 흐르며 세습 귀족으로 변했고, Baron보다 윗 등급의 귀족을 칭하는 말이 된다.
이렇게 영국에 두 개의 귀족 계급만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공작(Duke)이 탄생한다.
공작(Duke)과 후작(Marquess). 그리고 자작(Viscount)
Duke는 '공작'으로 번역되는데, 로마 관직의 dux에서 유래했으며 지도자란 뜻이다. 1337년 흑태자 에드워드는 영국 최초로 공작(Duke)위를 받았다. 14세기가 되어서야 공작위가 탄생했고 백작보다 높은 최고 작위를 차지했다. 중세가 끝나기 전 100년을 남기고서야 비로소 3등급 체계가 된 것이다.
그리고 Marquess(후작)가 등장한다. 당시 국경지역의 땅을 march라고 불렀는데, 국경을 방어하는 귀족은 다른 곳도 그렇듯 강한 군사력과 신뢰를 얻으며 힘이 점점 커졌다. 그러다가 힘이 아주 강해진 몇몇 군주들이 후작(Marquess)이 된다. 1385년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가 영국 최초로 더블린 후작이 됐다
이제 Viscount(자작)를 보자. 미국에선 지금도 '부통령'을 'vice president'라고 부른다. 라틴어 vice는 두 번째 직급이란 뜻인데, 백작(혹은 주 장관)의 다른 말인 Count에 붙어서 '부백작(혹은'주 차관')'이란 뜻의 Viscount가 됐다. 처음에는 영국의 행정단위인 카운티(county)의 장관의 부관에 해당하는 관직명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귀족 계급으로 변했는데, 1440년 존 버몬트가 영국 최초의 자작위를 수여받는다. 중세가 끝나기 13년 전이다.
그럼 자작이 단순 부관이었을까 세습귀족이었을까? 이건 상황마다 다르다. 백작이라고 다 똑같은 백작이 아니고, 자작이라고 다 똑같은 자작이 아니었다. 이름만 백작인 백작도 많이 있었고, 이름만 자작인 자작도 많았다. 그래서 공후백자남 서열이 안 먹히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며 귀족 계급이 다양해지면서, 자연스럽게 Baron은 최하위 귀족의 자리로 밀려났다. '기본 귀족' 작위 위로 새로 생긴 작위가 쌓아 올려진 것이다. 영국은 귀족 계급의 세분화가 상당히 늦게 된 편이다. 기존의 귀족보다 위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타국의 작위 때문인지 위쪽 작위들이 생겨나는 모습이 보인다.
Baron : '군인', '고용된 자'란 뜻. 원래는 모든 귀족을 부르던 말. 시간이 지나며 최하위 작위로 밀려남.
Earl : '지도자'란 뜻. 관직명이었다가 14세기 이전까지의 최고 계급. 시간이 지나며 3번째로 밀려남.
Duke : '지도자'란 뜻. 1337년 에드워드 왕자가 최초의 공작이 됨. 영국 최고 등급 귀족.
Marquess : '국경 군주' 정도의 뜻. 힘이 강해지며 1385년 최초의 후작위가 탄생.
Viscount : '부백작', '주 장관의 부관'이란 뜻. 관직명이었다가 1440년 최초의 자작위가 탄생. |
그 외에도 프린스(Sovereign Prince) 같은 작위가 있었으며(왕자가 아니다) 기사급으로 내려가면 기사 이외에도 훈작사(Bachelor) 등의 작위도 있었다. 중세 말부터는 준남작(Baronet) 같은 작위도 생겼다. 작위가 5개만 있던 게 아니다.
5. 신성로마제국(The Holy Roman Empire)의 귀족 : 공작(Herzog)과 백작(Graf)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중세 유럽 유일의 제국이었다. 그런 이름과는 달리 실제로는 중세 국가 중 가장 단합되지 못한 힘을 보여줬는데, 이유는 황제를 투표로 선출하며 각 지역의 강자들이 끊임없이 서로를 견제하는 거대 연합체였기 때문이다(그 외에도 대공위시대라거나 여러 역사적 사건들이 영향을 끼쳤다).
보통 중세의 귀족이나 기사에 대해서 말할 때, 뭔가 좀 중세틱해 보이거나 봉건제처럼 보이는 건 신성로마제국의 모습이 많이 들어가 있고, 좀 더 친숙한 왕국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건 영국의 모습이 많이 들어 있다. 흔히 말하는 중세의 이미지는 이렇게 여러 국가의 모습을 짜집기한 것이다.
이미지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Holy_Roman_Empire
14세기의 신성 로마 제국.
중앙의 붉은 테두리 안의 모든 영역이 연합체로서의 신성로마제국이다.
백작(Graf)과 공작(Herzog)
Graf는 백작으로 번역되는데, 어원은 쓰다(write)라는 뜻의 단어다. 본래 왕을 대리해서 행정구역을 다스리도록 파견한 행정 관직의 이름이었다. 프랑크 왕국의 붕괴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관직이 아닌 세습 귀족 작위로 변한다.
Herzog는 공작에 해당하며, '군대를 이끄는 자'라는 뜻에서 나왔다. 본래는 군권을 가진 관직이었던 것이 세습 귀족 작위로 변한다. 이들 중 일부는 정복한 지역의 유력자였는데, 이미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권력자에게 감투를 주어서 민심 안정을 도모한 경우도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이 되는 귀족은 이렇게 Graf와 Herzog라고 할 수 있다.
Graf(백작)의 파생 작위들
오늘날 '후작'으로 번역되는 작위는 Markgraf인데, '국경(mark)을 지키는 Graf'라는 뜻이다. 변경백(변경 백작)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Landgraf 또한 종종 후작과 동급으로 이야기되는데 '땅(Land)을 다스리는 Graf' 정도의 뜻이다.
공후백자남이란 체계가 억지 끼워맞추기라는 걸 잘 보여주는 경우이다. 일본은 영국과 아주 친한 사이였고, 영국을 기준으로 공후백자남 다섯 등급을 나눴다. 그런데 다른 나라를 보니까 다르네? 혼란스러우니 비슷한 힘을 가진 게 보이면 끼워맞추자. 이런 식인 거다. 국경을 지키는 Markgraf는 실제로 강력한 귀족인 경우가 많았으니까.
'백작'으로 번역되는 Graf에는 굉장히 많은 종류의 파생 작위가 있다. Pfalzgraf(궁전을 관리하는 Graf), Reichsgraf(제국의 Graf), Landgraf(지역을 다스리는 Graf), Burggraf(성을 지키는 Graf) 등등 10종류도 넘는 Graf가 존재한다. 이런 걸 보면 사실상 독일어권에서는 Graf가 영국의 Baron처럼 귀족이나 영주 같은 말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의 힘의 우열은 계속해서 변했다. Herzog를 견제하기 위해 Graf의 힘을 늘리기도 했고, Graf의 힘이 커지면 깎아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백작(Graf)은 공작(Herzog)급의 힘이 있었고, 힘을 뺐기거나 한 백작은 공작의 가신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 남작은 어떨까? 남작(Baron)에 대응하는 말 중에 Freiherr가 있다. 뜻은 '자유 군주(Free Lord)'이다. 이들의 땅은 Baron과 달리 의무에 묶이지 않은 완전사유지(allodium)였다.
Graf : '쓰다(write)'. 왕을 대리하는 행정 관료가 기원. 백작으로 번역.
Herzog : '군을 이끄는 자'. 군 사령관이나 지방 호족이 기원. 원래는 관직명. 공작으로 번역.
Markgraf : 국경에서 힘이 강해진 Graf. 후작이나 변경백으로 번역.
Freiherr : '자유 군주'. 남작으로 번역.
Pfalzgraf : 궁정백으로 주로 번역. 황제가 순회하는 지방 황궁의 관리자.
Landgraf : 종종 방백이라고도 번역.
Reichsgraf : 제국 백작/제국백이라고 종종 번역. 참고로 이 '제국(Reichs)~'이라는 건 다른 거에도 붙는다. '제국기사(Reichsritter)'처럼. 보통 황제 직속 가신을 말한다. |
이런 독일의 작위들은 영국보다 이른 10~12세기 즈음엔 관직들이 세습 귀족 작위로서 자리를 잡은 걸로 보인다.
그 외의 다른 지위나 작위들도 있었다. 선제후(Kurfürst)라든가, 퓌르스트(Fürst)라든가, 기사급까지 내려가면 미니스테리알레(Ministeriale) 같은 정말 다양한 종류가 있다. 그래서 공후백자남이 참 애매하다는 것이다. 숫자도 다를 뿐더라 나라마다 근본 체계가 달랐으니까.
6. 그 외의 국가와 중세가 끝난 이후의 작위
솔직히 프랑스의 작위 체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대략적으로 보면 프랑크 왕국이 분열하면서 서프랑크가 프랑스가 되고, 동프랑크를 모체로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했다. 그래서 이 둘의 시작은 매우 비슷하며, 프랑크왕국의 영향으로 인해 로마제국의 유산도 많이 엿보인다.
프랑스도 독일처럼 프랑크 왕국의 관료를 기반으로, 공작(Duc)과 백작(Comte)을 주축으로 한 귀족 체계로 시작했음이 보인다. 또한 영국과 독일 사이에 끼어서 양쪽의 영향을 다 받고, 또 양쪽에 영향을 다 끼친 모습을 보여준다. 개인적인 이미지로 어찌 보면 영국 독일 반반 느낌이랄까. 반반이라고 했지만 프랑스는 서유럽의 중심이었다. 독일은 프랑스의 문화를 계속 부러워했고, 영국은 고급 언어로 프랑스어를 오랫동안 사용했다. 당시 유럽의 프랑스어는 마치 오늘날의 영어와 비슷한 지위를 누린 것 같아 보인다.
이렇게 흔히 생각하는 중세 봉건제의 테두리에 있는 나라는 크게 영국/신성로마제국/프랑스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언급하지 않은 수도 없이 많은 나라들이 있는데, 각 지역마다 인접 국가의 영향을 받으면서 서유럽 중심지역들과는 다소간의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각각을 들여다 보면 또 나름의 매력이 있다. 특히 이슬람과 끝없이 싸우고 문화적으로 섞인 오늘날의 스페인 지역인 이베리아 반도도 따로 떼어놓고 보면 굉장히 개성있는 동네다. 레콩키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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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반도.
포르투갈,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과
아프리카 대륙에서 북상하는 이슬람과의 끝없는 대결.
시간이 흐르며 작위는 계속 변했다. 특정 작위의 힘이 커졌다가 줄기도 하고 숫자가 늘어났다가 엄청나게 줄어들기도 했다. 새로운 작위도 계속 생겨난다. 특히 아래쪽 작위가 많아졌는데, 돈이 부족해서 작위 장사 좀 해보자거나, 기득권에 끼워줄 순 없는데 작위는 줘야겠다거나 하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예를 들면 영국의 준남작(Baronet)이라거나, 독일의 에들러(Edler) 같은 것들 말이다.
세월과 함께 국가간의 교류도 점점 많아졌다. 필자가 볼 때 이것도 유럽 전체의 작위가 점점 닮아가는 흐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서로 비교를 하다보니 "우리나라의 Earl은 프랑스의 Comte나 독일의 Graf와 동급이다."라는 식으로 서로 급을 맞추고, 작위가 부족하면 새 등급을 만들어서 급을 맞추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타국의 작위를 말하는 번역어도 탄생했는데, 예를 들면 영국의 자작(Viscount)을 번역하기위해 만든 독일어가 Vizegraf다.
작위의 성질도 점점 변해갔다. 신하가 늘어나면서 땅 없이 작위 이름만 있는 귀족들도 늘어갔다. 왕권이 강화되어가며 영지 안에서 왕에 가까웠던 작위는 힘을 빼앗겼다. 영지가 없는 작위가 점점 늘어났다. 영지가 없으니 '공후백자남'의 이름이 가진 우열 순서도 점점 확실히 구분되어 갔을 것이다.
그렇게 서로 닮아가고 순서도 확실히 나뉘고 새로운 번역어도 생긴 19세기 말에는, 어쩌면 일본이 바라본 유럽의 작위 체계는 공후백자남이라는 다섯 등급과 제법 잘 어울려 보였을지도 모른다.
7. 마치며...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했던, 5년쯤 전에 완결된 '책벌레의 하극상(本好きの下剋上)'이라는 일본 판타지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중세 시대의 모습을 덕후처럼 늘어놓지 않으면서도 작가만의 방식으로 소설 속 세상에 잘 녹여냈는데, 마음에 드는 점 중 하나가 공후백자남 체계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급 귀족/하급 귀족'이란 개념은 실제로 비슷한 게 유럽에도 존재했다. 영국에서는 초기 Baron계급이 둘로 갈리면서 Greater Baron과 Lesser Baron으로 나뉘었고, 독일에도 Hochadel과 Niederer Adel 개념이 있었다.
번역을 하는 경우라면 기존의 관행이 있다고 치지만, 어차피 실제 중세랑 모든 게 다른 판타지 창작물에서 굳이 오등작을 써야 하나라는 생각이 종종 든다. 왜냐하면 판타지 속 중세는 정말로 실제 중세랑 모든 면에서 닮은 게 거의 하나도 없는 완전 창작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중세를 이해하지 않은 채로 오등작 같은 형태만 여기저기서 짜집기를 하니 세상의 모습이 이상해진다.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은 그게 뭐든 만들어진 이유가 있으며, 사회의 모든 요소는 서로 맞물려서 유기적으로 돌아간다. 잘 만들어진 창작 세계는 모든 구성 요소가 합리적이다. A가 있으면 B라는 것도 함께 있어야 하는 반면, 결코 공존할 수 없는 C라는 것도 있는 거니까. 마치 봉건제와 영지는 함께 있어야 하지만, 강력한 왕권은 공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웹툰 '나이트런'이 많은 덕후들에게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도 설정 때문이라고 본다. 인간이 검을 들고서 괴수랑 싸울 수 밖에 없는 합리적인 설정을 만들어 냈으니까. 이 카테고리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 중 하나가 이런 것이다.
뭐, 결국 창작자의 마음이고 재밌으면 용서가 되니 그러려니 하고 보기는 하지만 말이다. 결론적으로 현실의 중세 유럽 작위는 공후백자남과는 많이 달랐다. 기원부터 서로 달랐으며 계속 변화했다. 작위의 개수도 5개가 아니었고, 나라마다 시대마다 각자 달랐다. 판타지의 중세가 실제의 모습이 아니란 걸 창작자나 그걸 보는 사람이나 알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솔직히 패기있게 오등작에 대한 글을 첫 번째로 쓰고서 정말 후회했다. 원래 계획대로 차근차근 중세에 대해 풀었으면 체계가 잘 잡혔을 텐데, 배경 지식을 이전에 설명해 둔 적이 없으니 서론이 너무 길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설명은 못했으니 말이다. 3부로 나누고 싶은데 끊을 곳도 애매하고... 에휴.
아무튼 재밌게 읽어 보셨다면 좋겠다. 이 카테고리의 글 쓰는 순서에 대해서 고민 좀 해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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