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염 마법과 산소 : 산소는 불에 타지 않는다
2022년 10월 22일 · 오전 12시 00분
지난 번에 폭탄 얘기가 나온 김에 산소와 불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산소가 불은 뗄 수 없는 관계죠. 그렇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산소가 불에 '탄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산소는 타지 않습니다. 1. 산화(酸化)와 산화열 우리 모두 학교에서 배웠던 '산화-환원 반응'이란 게 있다. 산화(酸化, oxidation)란 어떤 물질이 산소(酸素, oxygen)와 결합하는 반응이다. 일상 생활에서 매우 쉽게 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쇠가 공기 중에서 녹이 스는 것이 산화 반응이다. 이걸 이용해서 겨울에는 핫팩, 즉 손난로를 만든다.
4Fe(철) + 3O2(산소) → 2Fe2O3(산화철) + 열
손난로는 쇳가루와 촉매를 함께 넣는데, 개봉하면 공기 중의 산소와 철이 결합하는 산화를 비교적 빨리 가속하도록 만든 아이템이다. 철과 산소가 산화철이 되면서 반응 전후에 보유하는 에너지 차이 때문에 남는 열이 방출된다. 흔히 이걸 산화열이라고 부른다. 겨울에 핫팩이 따끈따끈할 수 있는 이유다.
이미지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Hand_warmer 손난로.
2. 연소(燃燒) 반응 이제 '불'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자. 불타는 것을 전문용어(?)로 연소(燃燒)라고 한다. 연소란 연료가 되는 물질이 산소와 매우 빠르게 결합하면서 빛와 열을 내뿜는 반응이다. 연소에는 3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① 연료 ② 온도 ③ 산소 여기서 이미 산소가 '연료'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연소, 즉 불이란 여러 종류의 '산화 반응' 중에서도, 연료가 특정 온도(발화점)을 달성했을 때 빛과 열을 내뿜으며 격렬하게 산소와 결합하는 반응을 따로 떼어서 부르는 말이다. 이때 실제로 불에 타는 것은 가연성인 '연료'이며, '온도'라는 조건 하에서 '산소'라는 산화제와 결합한다.
촛불은 양초(=왁스=탄화수소)라는 연료가 산화되며 내뿜는 빛과 열이다. 그 옆의 성냥불은 적린이 마찰열로 발화점 온도를 달성해서 타오른 후, 나무를 연료로 유지되고 있다. 이 때 산화제인 산소는 공기에서 유입된다.
불이 났을 때 산소를 차단하면 불이 꺼진다. '연소'라는 건 연료가 산소와 결합하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산소가 차단되면 반응이 멈춘다. 주방에서 후라이팬 기름에 불이 붙을 경우 뚜껑을 덮어서 산소를 차단하면 불이 꺼진다. 이것은 소화기의 원리(중 하나)이기도 하다. 연소 반응에 산소 공급은 필수이며, 산소가 없으면 불은 붙지 않는다. 또한 산소를 많이 공급하면 반응이 가속되기 때문에 불은 더욱 빠르고 격렬하게 타오른다. 과거 사회에서는 대장간에 풀무라는 도구가 발명되어 보급되었기 때문에, 인류는 더 높은 온도로 금속을 녹일 수 있게 됐다. 3. 그러나 산소는 불에 타지 않는다 연소 반응에 산소가 필수이고, 산소가 많이 공급되면 불이 격렬해지며, 산소가 차단되면 불이 꺼진다. 그러다 보니 산소가 '불에 타는 물질'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산소는 타지 않는다. 조금 이상한 얘기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불이 일어날 때 산소가 필수인데, 산소가 불에 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말이다. 이것은 산소'만' 있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면이 강철로 된 방 안에 산소가 가득 차 있다고 해 보자. 안에는 순도 100%의 산소와 강철 벽 외의 어떤 물건도 없다. 여기에 불꽃을 일으키면 폭발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불이 붙지 않는다. 터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산소 자체는 불에 타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시작하면서 연소란 '산소와 결합하는 반응' 중 일부를 따로 분류한 것이라고 말했다. 산소가 물질과 결합하는 반응은 '불' 이외에도 거의 모든 곳에서 계속 일어난다. '불과 산화'는 서로 포함 관계는 되겠지만, 불=산소 가 아니다. 그래서 산소는 불에 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소는 다른 물질을 산화시키는 물질일 뿐이다.
고압 산소 탱크에 불을 붙이려고 해도 불은 붙지 않는다. 연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절대 실제로 해 보진 말자.)
그렇다고 "산소에 불이 안 붙는다고?" 라면서 산소 농도가 높은 환경이나 산소 탱크에 불을 '절대로' 붙여보지 말자. 왜냐하면 근처의 다른 물질들에 불이 매우 쉽게 붙을 수 있는 환경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산소 농도가 높은 상태에서는 불(격렬한 산화)이 매우 쉽게 붙는다. 화재의 위험이 엄청나게 높아지며, 일단 연료가 되는 다른 물질에 불이 붙으면 엄청난 화력으로 연료를 불태운다. 이런 면에서 '다른 연료가 타고 있는 동안'에는 산소가 공급되면 불이 커지는 것이 맞다. 작은 불씨도 큰 화재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반응이 훨씬 일어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환경에서 절대 화재로 이어지지 않을 상황임에도, 고농도 산소 환경에선 화재로 이어진다. 실제로 고압산소실 같은 의료에 관련된 환경에서 상당히 자주 화재 사고가 난다고 한다. 노파심에 계속 얘기하고 있으니 절대 실제로 해 보지 말자. 할 거면 전문가와 함께 통제된 실험실에서...
※ 내용 업데이트(2025년 6월) : 이 글을 쓸 당시엔 몰랐는데, 강철 속에 산소만 차 있을 때 내부가 미량의 연료 따위에 의해 오염되어 불꽃이 일어날 경우 실제로 폭발한다고 합니다. 이유는 방금 언급했던 것처럼, 초고농도 산소가 존재하는 환경에서는 일반적인 환경보다 연소 반응이 훨씬 일어나기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계속 설명한 이론 자체는 맞습니다만, 고농도 순수 산소는 금속을 연소시킬 정도로 환경을 바꾼다고 하네요. 강철 같은 금속 용기 내부에 불꽃이 생길 경우, 강철 자체가 연료로 변해서 산소와 결합하며 타오릅니다. 그 결과 강철 용기 그 자체가 불에 타서 터지고요. 그 이후 주변과의 연쇄적인 연소와 폭발 반응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압축 산소를 보관하는 용기는 재질이 강철계열 합금이거나 알루미늄인데요. 그래서 내부에 산소와 반응하지 않는 종류의 코팅을 따로 한다고 하네요. 내부 표면에 이상이 생겨서 순수 금속과 고압산소가 만나게 되는 경우 실제로 폭발 사고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말을 한 김에 조금만 더 설명하자면, 산소 탱크는 불에 휩싸이면 터진다. 왜냐하면 탱크 안에 있는 산소의 부피가 열로 팽창되면서, 강철 탱크가 견딜 수 있는 내구도를 넘어서는 시점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재 현장에 산소통 같은 게 있으면 폭발한다. 팽창 압력으로 일단 터지고, 그 후에는 주위의 탈 수 있는 물질들과 반응해서 엄청난 화염을 일으킨다. 산소는 타지 않으니 산소통은 터지지 않는단 생각 같은 건 하지 말자. 아무튼 다시 연소 얘기로 돌아와서, 불이란 건 연료가 다 타서 산소만 남게 되면 더 이상 타오르지 않는다. 산소가 연소 반응을 돕는 건 연료가 남아 있을 때까지만이다. 100% 산소는 혼자 타지 않는다. 4. 어딘가 이상한 화염 마법과 산소의 관계 산소통 얘기를 쓰면서 이 얘길 괜히 하고 있나 싶어서 길어졌는데, 이제 본론(?)인 화염 마법으로 들어가 보자. 웹소설을 보면 지구에서 판타지 세계로 가서 마법사가 된 뒤에, 과학 지식을 응용한다면서 산소를 모아서 거대한 화염을 만드는 장면이 생각보다 꽤 자주 나온다. 불 마법을 일으킬 때 '산소'를 태운다는 식의 설정이 많다. 대기 중의 산소를 대량으로 모아서 (허공에서 다른 연료 없이) 강력한 화염과 폭발을 일으킨다.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건지 이제 다들 아셨을 거다.
허공에 떠 있는 파이어볼에 바람(산소)을 모아서 불을 키우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과학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다. 허공에 생긴 마력의 불에 대량의 산소가 유입되었을 때 대체 뭐가 타는 걸까? 연료가 없다. 산소가 대량으로 공급되어도 결합할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건 '마법'이고 이미 '마력(魔力, mana)'이 불로 치환되고 있는 시점에서 현대 과학으로 설명이 안 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지구인이 판타지 세계에 가서 '지구의 과학 상식'을 써서 허공에 산소를 모아서 불을 키운다는 것은, 지구의 과학 지식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마나(=마력)가 산소와 결합해서 산화된다(2Mana + O2 → 2ManaO ?)는 것도 이상하고, 마나가 물질로 치환된 후에 불에 탄다고 하기엔 신의 권능인 물질 창조의 영역이고... 그냥 이유 없이 산소가 '타서 없어진다'고 하면 그 세계는 산소라는 원소가 점점 줄어드는 멸망의 운명을 걷는 곳이 된다.
놀랍게도 이 일러스트레이터는 안에 '불에 탈 물건'을 넣어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화염 마법을 '산소'로 키운다는 것은 그렇게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설정이나 묘사가 아니다. 마법을 지구의 과학이랑 어설프게 조합하면 오류가 나오기 쉽다. 우리가 아는 산소는 불에 타거나 폭발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다른 무언가(연료)에 붙은 불을 산소나 바람으로 키우기는 쉽다. '허공의 불'이 아니라 피격 후에 불타는 화염을 부채질하는 건 매우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5. 마치며... 우리 모두 어렸을 때 배웠는데 시간이 오래 지난 지식에 대한 글이었다. 결론적으로 불에 타는 것은 가연성인 '연료'다. 산소는 연소 반응에 필요한 산화제로서 연료가 불에 탈 수 있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불에 타지 않는 비가연성 물질이다. 판타지에 나오는 마법의 불은 애초에 연료 없이 타고 있는 현상이기 때문에, 솔직히 산소가 전혀 없어도 잘 탈 것이다. 물에 꺼지는 게 더 신기할 정도다. 사실 고위급 마법에선 '절대 꺼지지 않는 불길'이라거나 '존재를 태우는 불길' 같은 아예 다른 개념의 무언가도 나오긴 하는데... 어찌 보면 '마법의 불'이란 게 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들인 것 같다. 설정을 치밀하게 하면 산소에 대해서 어찌어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보통 그런 걸 원하고서 쓰는 건 아닌 것 같으니까. 차라리 바람 마법으로 먼지 같은 걸 모아서 분진 폭발 환경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게 훨씬 지구의 지식을 살리는 길일 것 같다. 어려운 부분은 마법으로 어찌어찌 했다고 말하면 되니... 이 글은 카테고리 분류를 할 때 참으로 고민이 되는 글이었다. 글의 태반이 불에 대한 얘기라 SF 카테고리로 넣어야 하나 싶었지만, 본론(?)은 마법 얘기였으니 판타지 카테고리에 넣었다. 3분할 카테고리가 종종 이런 류의 고민을 안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