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아 다니던 중세의 왕
2022년 11월 09일 · 오전 12시 00분
1. 수도가 없었던 중세의 국가들 이 연재를 시작한 계기 중 하나는, 소설이나 만화에 나오는 ―더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세가 실제 중세와 매우 다르기 때문이었다. 보통 생각하는 중세 왕국이 얼마나 달랐는지가 오늘의 주제에서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중세의 '국가'는 오늘날 생각하는 국가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애초에 국가란 형태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으며) 거의 모든 면에서 개념 자체가 달랐는데, 오늘 할 얘기는 바로 '수도가 없었던 국가'였다는 것이다. 중세에는 수도가 없었고, 왕이 가만히 수도에 정착해서 있지도 않았다. 영국,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모두 그랬다. 처음에는.
연재 초기에 중세는 봉건제 국가라고 이야기했다. 군주와 신하는 봉신서약을 맺는데, 군대를 키우고 필요할 때 보내는 대신 땅을 빌려주는 계약 관계라고 말했다. 중세, 특히 중세 말 이전의 국가란 이런 '개인과 개인' 사이의 계약으로 묶여 있는 네트워크 집단이었다. 중앙 행정부와 관리 시스템이 없이, 모두가 각자 도생하는 와중에 (집단이 아닌) 개인 간의 계약 관계만이 그물망처럼 퍼져 있는 게 중세의 국가였다. 그러다 보니 왕은 영토를 돌보기가 어려웠다. 신하의 땅에 왕이 파견한 관리가 있던 것도 아니고, 구성원을 감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체계가 존재하질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 그냥 왕이 왕국 전체를 끊임없이 돌아다녔다.
2. 서유럽에서 보편적이었던 순방 정부(Itinerant court) 영토를 돌아다니는 '여행하는 정부'는 중세 초 프랑크 왕국을 연 메로빙거 왕조 때(5세기) 이미 시작되었다. 카롤링거 왕조 때도 마찬가지여서, 카를 대제가 재위 기간 동안 여행한 거리는 지구를 몇 바퀴나 도는 수준이었다고 한다(심지어 저 시대의 남성은 마차를 타지 않고 말만 탔다). 프랑크 왕국 멸망 후의 중세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영국(England) 역시 모두 왕국을 끊임없이 여행했다. (빠른) 교통, 통신, 중앙행정 시스템이 모두 없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이건 왕만이 그랬던 게 아니라, 성직자들과 귀족(특히 강력한 대영주들)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그 중에서 황제가, 그 다음으론 왕이 가장 열심히 돌아다녔다.
이미지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Holy_Roman_Empire by Sémhur and OwenBlacker, CC BY-SA 3.0 신성로마제국의 영토(10-11세기).
여행하는 정부는 11세기 무렵까지 서유럽의 보편적인 통치 방법이었다. 주민들은 영토를 돌아다니는 황제와 왕을 반겼다. 그들은 최고 재판관이었고, 경우에 따라 영주를 추궁하고 책임을 물을 수도 있었다. 황권은 그 자체로 신성이 부여된 것이기에, 지역에 머물면 행운과 풍년, 다산을 가져온다는 믿음도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방문단이 소비하는 엄청난 음식들과 연회 때문에 상당한 부담이 되기도 했다. 규모가 커질 경우 단독으로 감당이 안 되어서 근처의 영지에서 물자를 조달받는 경우도 있었다(물론 대개 이런 자원들은 처음부터 황제를 위해 비축된 것들이었다). 그러다가 서서히 중앙에 행정력이 모이고 경제적으로 부흥하면서 하나 둘 수도 비스무리한 게 생겨났다. 역시 가장 빨랐던 것은 영국이었다(연재 초에 '왕국'에 가까운 모습이 영국이고, '봉건제 국가'에 가까운 것이 신성로마제국이라고 이야기했었다). 영국은 왕권에 도전하는 귀족이 비교적 적었고, 비교적 안정된 시스템을 일찍부터 구축했다. 그래서 12~13세기 무렵에는 오늘날 런던에 위치한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가 중세 유럽 최초로 수도 비스무리한 것이 되어 갔다. 단번에 바뀐 것은 아니고 점진적으로 바뀌어 가다가, 대략 14세기 중반에는 확고해졌다고 한다. 3. 팔츠와 궁정백 중세의 군주들이 모두 영토를 돌아다녔다고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만큼 열심히 돌아다닌 지배자는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을 보면 팔츠(Pfalz)라는 시설과 궁정백(Pfalzgraf)이라는 직책이 있었다. 여기서 팔츠(Pfalz)는 라틴어 팔리티움(palatium)에서 유래한 말로 '궁전'이란 뜻이다. 궁정백(Pfalzgraf)은 Pfalz(궁전)와 graf(백작)의 합성어로 '궁전 백작'이란 뜻이다. 제국에서 팔츠는 황제가 여행 중 머무는 거주지였고, 황제가 없는 동안 팔츠를 관리하던 직책이 바로 궁정백이다. 궁정백은 황제의 직속 대리인이기에, 백작 중에서도 강력했다. 팔츠는 보통 말이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인 약 30km 이내의 간격으로 있었는데, 연합체인 제국의 독일-이탈리아-오스트리아 영역을 계속 돌아다녔으니 정말 엄청난 숫자에 엄청난 거리였다. 물론 팔츠가 모든 지역에 있었던 것은 아니며 순방로(itineraries)를 따라서 주요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자급자족 체제를 갖춘 황제의 영지였으며, 황제의 방문을 늘 대비하며 물자를 비축해 두어야 했다.
이미지 출처 : https://mittelalter.fandom.com/de/wiki/Aachener_Kaiserpfalz 아헨 황궁(Aachener Königspfalz)의 상상도. 아헨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이 열리던 중요한 장소였다.
제국의 황제는 엄청나게 바빴다. 일단 돌아다니느라고 바빴다. 1년에 최소 수백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계속해서 이동했다. 자동차도 기차도 비행기도 없이, 수천 명의 수행원과 함께 계속해서 돌아다녔다. 한 곳에서는 짧게는 며칠에서 길어도 몇 주 정도만 머물렀다고 한다. 황제라는 빛깔 좋은 직책은 그야말로 역마살이 낀 것이었다. 중앙의 통제 시스템이 없고, 연락망도 운송망도 없던 시절, 이 순방 여행(itineration)에 의한 통치는 굉장히 중요했다. 일차적으로는 봉신들을 찾아다니면서 감시하고 관계를 재정비하며 관리를 했다. 교회를 방문해서 성직자들과의 관계도 점검했으며, 행사와 연회를 열었다. 팔츠 중에서도 각 황제마다 선호하는 궁전이나 특별히 중요한 궁전이 따로 있었는데, 겨울궁전(Winterpfalzen)과 축제궁전(Festtagspfalzen), 부활절궁전(Osterpfalzen)이 그것이었다. 이런 특별한 궁전에서 종종 중요한 교회 축일을 맞이했고, 외빈을 맞이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도 굉장히 의미 있는 행사였다. 또한 현지의 실태를 파악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민심을 돌봤다. 이때 정말 중요한 기능으로 황제가 주관하는 법정을 열었다.
원본 출처 : https://de.wikipedia.org/wiki/Kaiserpfalz_Goslar Kaiserpfalz Goslar by Geschichtsfanatiker, CC BY-SA 4.0 1879년 복원된 고슬라르 황궁(Kaiserpfalz Goslar). 신성로마제국의 팔츠들은 파괴되어 유적이나 폐허로 변했지만, 팔츠(Pfalz)라는 이름이 붙은 지명들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 외의 부차적 기능은 식량 문제였는데, 제국 초기의 운송 시스템으로는 한 지역에서 수천 명 단위의 황실 인력을 1년 내내 먹이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황실이 소모하는 자원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충당했다는 기능도 있었다. 각 팔츠나 방문지에는 황제가 없는 동안 자원이 쌓이고, 황제가 도착하면 그걸 먹어치우고 이동하는 식의 재미있는 시스템이었다. 다른 지역의 왕이나 대영주들도 마찬가지였다. 물자 운반 자체가 힘들고 비용이 많이 들었으며, 물자를 한 자리에 모은다고 해도 아직 상거래가 활성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현지 소모가 유리했다. 물론 이런 기능은 신하들과의 결속을 높이고 영역을 관리하는 것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4. 수도를 가진 고정된 정부로 시간이 흘러 정부의 기능이 점차 집중되고 경제가 발전됨에 따라, 여행을 하는 것보다 정주 하는 것이 더 효율적으로 변했다. 특히 과거의 봉신 관계는 구두 계약에 머물러 있었는데, 모든 게 문서화되면서 중앙 시스템이 정비되었고, 왕실과 귀족들은 근거지에 정착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약 12~13세기 무렵에 시작됐다. 16세기가 되면 (거의) 모든 국가가 수도를 갖고서 더 이상 여행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가장 오랫동안 돌아다닌 것은 신성로마제국이었고, 제국에는 결국 마지막까지도 공식적인 수도가 없었다고 한다. 중앙집권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영방국가의 한계랄까. 하지만 그런 신성로마제국조차도 황제들이 선호했던 도시나, 전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도시들은 있었다.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궁전에 있는 그레이트 홀. 약 1.5 제곱킬로미터의 면적으로 12세기 당시 유럽 최대 규모였다. 위의 그림은 19세기 조지 4세의 대관식 연회의 모습이다.
그렇게 유럽의 국가들은 중세의 후반부가 되어, 혹은 근세 초에는 수도를 갖고 정착했다. 강력해진 왕의 권력, 늘어난 관직, 체계화된 행정과 함께, 정비된 조세 체계로 모이는 자금과 문서화라는 수단이 이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현대 국가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중앙 행정부는 만들고 싶다고 쉽게 만들 수 있었던 게 아닌 것이다. 실제로 중세의 군주들은 진작부터 이런 걸 하길 원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해내지 못했다. 영국이 런던에 정착을 하는 과정을 보면, 기존의 런던 기득권에게서 왕이 권력을 빼앗는 과정이 있다는 게 재미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기에 왕국이라고 하면 당연히 수도가 있고 왕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인데, 왕이 런던을 수도로 삼기 위해서 권력 싸움을 해야 한다니... 5. 마치며... 중세가 얼마나 모래알 같은 시대였는지를 순방 정부가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지역과 신분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중세 초까지 유럽의 지배자들은 자신의 영역을 직접 돌아다니며 감독했다. 황제, 왕, 귀족 성직자 모두 그랬다. 중세라는 시대는 판타지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정체된 상태로 500년, 1000년이 흐른 것이 아니라 매우 역동적으로 변화했다. 근거지가 없던 이런 형태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프랑크 왕국 시절에 생긴 거주 방식의 영향이다. 프랑크 시절에는 관료제가 살아 있어서, 왕이 요직에 임명하는 귀족이 강력한 힘을 가졌다. 이 때 친척 중 한 명이 강성해지면, 다른 친척들이 주위에 우르르 몰려 들며 이주를 했기에, 고정된 정착지란 개념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다고 한다. 참 재미있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중요한 장소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카를 대제 통치의 끝 무렵, 아헨은 프랑크의 수도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프랑크 멸망 후엔 관직이었던 백작과 공작이 토착화되며 작위로 변했는데, 9~10세기, 즉 우리가 아는 중세가 된 후로 귀족과 왕의 첫 번째 힘은 그들의 근거지인 자치령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말이 되기 전까지는 관리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돌아다녔다. 수도가 생기고 우리가 생각하는 전근대국가의 체계가 잡히기 시작한 것은 중세 말인 14세기 전후이다.
이미지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Itinerant_court A Fourteenth-Century English Carriage, by Ezra Funes, CC BY-SA 4.0 14세기 영국의 여행 마차.
다음 연재에서는 이번 내용에 연결해서, 중세의 가족과 가구(家口)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중세의 가구란, 혈연만이 아니라 중세에서 한 집에 살던 모든 구성원을 이야기한다. 같이 사는 가신들이나 하인들까지도 말이다. 그들은 다 같이 왕이나 귀족을 따라서 영토를 여행했다.
▶[중세의 가구, 그리고 집사와 마구간지기]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