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가족 (1) : 가족제도의 변화와 방랑 기사
2022년 12월 03일 · 오전 12시 00분
1. 게르만 전통 가족의 모습 흔히 '중세 유럽'이라고 하면, 일부일처제 사회에, 귀족은 기껏해야 조부모부터 손자 정도까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고, 비(非)귀족은 보통 핵가족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원래 게르만족은 일부다처제에, 가장(家長)을 중심으로 직계 가족부터 친척에 온갖 방계 혈족까지 모여 사는 거대한 확대가족 사회였다. 집단 전체는 가장에게 복종을 했고, 구성원 개인의 이익이 아닌 혈족 집단의 자체를 위해서 움직이는 사회였다. 동양을 포함한 전 세계의 전통 사회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프랑크 왕국을 세운 게르만족 왕, 클로비스 1세.
그럼 왜 평범한(?) 가문 중시의 일부다처제 혈족 사회가, 중세가 되어 일부일처제의 작은 규모의 개인주의적 가족으로 변했을까? 바로 기독교 때문이다. 기독교는 종교적 교리를 이유로 로마 시대부터 가족 제도를 바꾸기 위해 정말이지 '집요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게르만 사회로도 이어져서 무려 500년이 넘는 노력 끝에, (우리가 흔히 '중세'라고 생각하는) 10세기 무렵의 게르만족은 일부일처제 등을 당연한 제도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교회는 그 후로도 멈추지 않았고, 결국 1000년이 넘는 노력 끝에 현대 서양식 가족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한국에서도 채택하고 있는 바로 그 가족 제도다. 그 중에서 일부일처제는 다음 연재에서 보기로 하고, 이번엔 상속제도와 직결되는 '근친혼 금지'에 대해서 살펴 보자. 가족 형태를 가장 크게 바꾼 제도이다. 2. 근친혼 금지와 상속 제도 근친혼이란 사촌 등 가까운 촌수의 혈족과의 결혼이다. 일견 근친혼과 상속은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일지 모르나, 사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붙어 있는 개념이다. 여기서 잠시 현대 서양식 가족이 심한 거부감을 느낄 '근친혼'에 대해 조금만 설명하겠다. (2-1) 근친혼의 장점 왜 현대 이전에 지구 상의 대부분의 전통 사회에서 근친혼이 흔했을까? 원시 시대에는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무리 사회를 이룬 이후로는 근친혼의 장점은 명확했다. 바로 힘의 집중과 재산의 보존이다. 가문의 재산은 전쟁이 아니더라도 두 가지 이유에서 큰 손실을 겪을 수 있다. 하나는 결혼 때문인데, 전통 사회에서는 신랑이 신부의 가문에 신부값을 지불하거나, 반대로 신부가 지참금을 가져오는 문화가 흔했다. 이 금액은 사회적 지위에 따라 굉장히 커질 수 있었고, 과거 사회가 자녀가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가문의 재산이나 토지의 상당 부분이 결혼 비용으로 소모될 수 있었다.
이미지 출처 : https://eo.wikipedia.org/wiki/Familio, by Ojedamd. La Familia de Ojeda Ruiz de Luna. CC BY 3.0 ※ 이 사진은 근친혼과는 무관합니다. 스페인의 가족 행사에 모인 11명의 자식과 20명의 손자들. 고작 3대로만 이루어진 대가족이다. 확대가족은 여기에 친척과 방계 혈족도 포함된다.
다른 하나는 상속을 통한 손실인데, 자녀들에게 재산, 특히 토지를 분배해서 나눠줄 경우 재산은 자식의 수만큼 토막이 난다. 재산이 100이었어도 자식이 다섯이면 한 세대만에 5등분되어 20으로 줄어들게 된다. 특히 게르만족은 '분할 상속'이라는 균등 분배 관습을 갖고 있었고, 이건 유럽을 거의 통일했던 프랑크 제국을 삼등분 시켜 멸망시킨 방아쇠였다. 전통 집단은 이것을 막기 위해 근친혼을 선택했다. 함께 사는 집단 안에서만 결혼이 이루어지면, 부부 단위로는 재산이 나뉠지언정 전체 규모에서는 재산이 나뉘지 않는다. 심지어 문자 그대로 '피를 통해서' 묶여있다. 그러다 보니 근친혼과 거대 혈족 집단은 거의 모든 사회에서 나타났다. 옛날 이야기에서도 특정 성씨들이 모여서 사는 집성촌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지 않는가. '집단'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근친혼의 장점은 이외에도 더 있지만, 이번 연재에서는 상속제도를 위주로 이야기할 것이기에 생략하겠다. (2-2) 교회의 근친혼 금지 그런데 이런 지구의 표준적(?)인 결혼 제도에 태클을 거는 존재가 나타났다. 바로 기독교였다. 기독교의 관점에선 '매우 특이하게'도 근친혼이란 도덕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신의 섭리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러고서 무려 8세기에 프랑크 왕국에서 기념비적인 7촌 이내 결혼 금지법이 통과가 되었다. 정말 유래가 없을 정도의 사건이다. 한반도에서조차 거의 1000년이 지나 조선에 성리학이 퍼진 후에야 근친혼이 금지되지 않았는가. 참고로 7촌이 어느 정도로 먼 것이냐 하면, 증조할아버지의 다른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이 7촌이다. 저 시대는 이 정도 촌수를 계산할 수 있을 정도로 족보를 따지지도 않을 때였다. 한 마디로 먼 과거에라도 혈연이었던 기억이 존재한다면 그냥 결혼하지 말란 이야기였다. 3. 중세 가족 형태의 격변 (3-1) 9세기 전후 : 격변의 시작 갑작스래 7촌 금지법이 도입된 후, 함께 모여 살던 혈족 집단은 인근 지역에서 결혼할 사람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문제는 교회의 영향력을 귀족조차 무시하기 힘들었다는 것. 그 결과 젊은이들은 먼 외지로 결혼을 하기 위해 떠나야 했다. 여기에 결혼 비용과 분할상속 제도의 콜라보가 들어갔고, 혈족의 재산과 토지가 여러 집단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유럽의 가족 규모는 작아졌고, 외지로의 여행과 정착이 흔해지게 됐다. (물론 이 주제는 훨씬 더 복잡하지만 6편을 넘어가던 분량을 3편으로 줄인 거니 양해 바란다.)
또한 혈족 사회가 흩어지자 그때까지 중요하지 않았던 '하인'들의 집단이 가구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부상했다. 이전의 집사 연재 등에서 나온 하인과 가신의 중요성이 이 때 크게 부각된 것이다. (3-2) 유언장과 사회의 혼란, 그리고 재산의 기부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오랫동안 공을 들였던 다른 분야가 결실을 맺었다. 상속은 유언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언의 집행은 당연히 죽음과 사후세계를 관장하는 교회가 맡아야 했다. 그런데 이 때는 마침 바이킹과 사라센족과 마자르족이 유럽 전역을 약탈하며 기승을 부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들은 이후 수 백 년 동안 유럽을 공격하며 농촌을 초토화시키고 귀족들의 골치를 썩였다.
※ 내용 수정에 대한 공지 : '종말론' 부분을 수정을 했습니다. 원래는 서기 1000년 경에 돌았던 종말론을 언급하는 정도의 의도였는데, 문맥 상 앞뒤 글과의 인과관계가 당시 종말론의 분위기를 굉장히 과장하는 것 같아서 수정했습니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하자면, 기독교는 태생부터 종말을 기반으로 한 종교였고 특히 과거에는 계속 종말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서기 1000년 경에 다소 두드러졌고요. 하지만 10세기 전후의 종말론은 17세기와 19세기의 학자들에 의해 과장이 된 이후 논쟁의 주제로 떠올랐습니다. 이후 100년이 넘게 당시 종말론에 대한 논란과 연구가 있었고, 존재는 했지만 전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는 것이 현 시대의 결론입니다. 이 논란에 관심이 있으시면 The New York Times의 《Beliefs; Millennial fears in the year 1000: apocalypse then, apocalypse now and apocalypse forever.》나 Boston University의 《The Fear of an Apocalyptic Year 1000》같은 글을 검색해서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파트에 쓰여진 내용은 종말론과 무관하게 여러 자료에 언급된 내용입니다. 신뢰도를 위해 구체적인 자료 출처를 말씀드리자면, 마르크 블로크의 《봉건사회1》, Frances Gies와 Joseph Gies의 《Marriage and the family in the Middle ages》, 조지프 헨릭의 《위어드》에서 이 파트에 쓰인 외세의 침략과 사회의 불안과 혼란, 그리고 유언과 기부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좌) https://eu.wikipedia.org/wiki/Bikingo_ontziak, by Gbloquendox00black, CC BY 3.0
한편 9~10세기는 프랑크 제국이 멸망하고 귀족 가문의 가신과 전사들이 독립해서 떠나가던 시기, 즉 봉건 사회의 시작이자 '집사'편에서 이야기했던 농민 출신의 가구 책임자들이 떠오르던 때였다. 기존 시대의 질서가 파괴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혼란기였다.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했지만, 중세는 사후 세계의 구원과 지옥의 공포가 매우 큰 시대였다. 혼란스러운 시대적 배경과 급성장한 교회의 영향력으로 인해서, 귀족들 사이에선 유언을 남겨 전 재산을 교회에 기부하는 풍조가 전염병처럼 확산되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였다. 필자 생각에 이전까지 그래 본 적이 없다 보니, '전 재산을 기부한다'는 게 뭔지 귀족들이 잘 몰랐던 것 같다.
전 재산을 기부해 본 건 처음이라서요...
교회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는데, 10세기의 교회는 서유럽 경작지의 3분의 1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나중엔 귀족들이 외적의 침입을 방어할 무기와 재산이 없어서 교회에 돈을 구걸할 정도였다. (3-3) 귀족 가문이 맞이한 심각한 위기들 9세기 즈음부터 시작된 전통 가족의 분열과 재산 분할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충격이었다. 예컨대 프랑스 마콩 지방에서 권세를 누리던 6대 가문의 영토는, 서기 1000년 무렵이 되면 24가족의 소유지로 분할되었다. 또한 교회에 대한 재산 기부의 결과로, 950년 경까지 알려진 유럽의 이름난 가문 중 상당수가 서기 1000년 경에는 농민과 구별하기 힘든 수준으로 몰락했다. 기존의 귀족이 대거 몰락하고, 원래는 하인이나 전사에 불과했던 자들이 새로운 봉건제 국가의 신흥 귀족층으로 부상했다(프랑크 제국의 멸망과 바이킹 침략이 이 현상에 손을 거들었다). 원래 농민이나 노예였던 자들은 귀족 가문의 요직에 앉아서 새로운 권력을 쥐었다. 그리고 이런 혼란과 위기는 11세기가 되면서, 장남이 아닌 자식들을 슬픈 운명에 처하게 만든다. 4. 장자상속제와 방랑 기사 (4-1) 장자상속 제도의 도입 11세기가 되자 유럽의 귀족들은, 10세기까지의 사건들을 돌아보게 된 것 같다. 먼저 혈연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면서, 흩어졌던 혈족들이 가문의 수장 아래로 뭉쳤다(한 지붕 아래서 같이 산 건 아니다). 이로써 가족 중심의 군사 방위 공동체가 부활했다. 이 때는 귀족의 성씨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변화는 장자상속 제도의 탄생이었다. 분할상속의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형제가 재산을 공유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장자가 모든 것을 갖는 제도가 전 유럽에 퍼지게 되었다. 그 결과 귀족의 가문은 (경제면에서는) 안정성을 되찾았다. 문제는 이전 시대의 문제점에 대한 대책이었던 이 제도가, 장자 이외의 자식들을 신경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4-2) 방랑 기사 : 각자도생해야 하는 자식들 이런 말을 들어보신 분도 계실 것 같다. “중세 시대에 차남 이하의 형제들은 결혼을 할 수도 없었고, 독신으로 외롭게 살다가 죽거나 수도원에 보내졌다”는 이야기. 이건 장자상속제가 정착한 직후 12~13세기의 모습이다. 장자상속제는 귀족 가문의 힘을 보존시켰지만, 차남 이하의 개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장남이 아니면 재산이 없었기에 결혼을 할 수조차 없었다. 지참금도 없고, 직업도 없고, 생계를 꾸려 나갈 수단도 없었다. 심지어 아예 결혼을 금지하기도 했고, 수도원에 보내버리기도 했다. 결국 12세기의 장남 이외의 형제들은 알아서 재산을 모아서 알아서 결혼을 해서 알아서 먹고 살아야 했다. 그런데 농민도 아니고 귀족에게 이게 쉬운 일인가. (참고로 이 시대에는 농민 역시 개척촌으로 가거나, 도시로 가서 남의 밑에서 일을 배우고 독립하는 것이 흔해졌다.) 아들들은 굉장히 많은 경우 기사가 되어서, 부와 재산과 영지를 줄 수 있는 주인을 찾아 정처없는 여행을 다녔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방랑기사, 혹은 편력기사(일본에선 '모험가'라고도 번역된다)의 탄생이다.
그들이 처했던 현실과는 별개로 편력기사는 수많은 모험담의 원천이 되었다.
이들은 악명을 떨치기도 했지만, 당시의 사회 시스템에서 버려져서 먹고 살 수단도 결혼할 수단도 없는 불쌍한 부평초들이었다. 운이 좋아서 성공을 하면 영지와 아내를 얻고 곱게 죽을 수 있었지만, 많은 경우는 공을 세우기 위해 토너먼트와 전쟁터를 전전하다가 스러지는 파리 목숨들이었다. 참고로 이들이 결혼에 성공할 경우 나이가 거의 40살에 이르렀다. 딸들도 마찬가지였다. 귀족의 딸들은 아버지의 뜻에 운명이 완전히 종속되는 처지가 됐으며, 아버지가 남편을 (돈으로 사서) 찾아주지 않는 한 먹고 살 방도가 없었다. 결국 수많은 여성들이 수녀원에 들어갔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유럽 전체의 수녀원의 숫자가 찾아오는 귀족 여성의 수를 감당 못할 정도였다. 심지어 이런 여성들이 모인 독신 여성 공동체 사회가 만들어질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심각한 사회 문제였다. 5. 13세기 이후의 유럽의 가족 이렇듯 10세기 전후의 격변하는 시대와 제도의 혼란 속에서 중세의 가족은 크게 변모했다. 가장 큰 원인은 기독교의 근친혼 금지 교리였다. 결국 12세기에 (시대적인) 안정기가 시작되었을 때에도 귀족 가족은 여전히 과도기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후 13세기가 지나며 귀족 부모들은 가능하면 어느 정도의 재산을 (장남 아래의) 다른 자식들에게도 나눠주고 싶어 했다. 이것은 장자상속제와 부딪히는 문제였지만, 아주 오래 전의 관습법을 꺼내서 부활시킴으로서 일정 부분 해결이 되었다. 그 후 복잡한 우여곡절이 있는데 결론만 요약하자면, 결국 귀족 가문의 토지와 재산이 또 다시 조각나는 결과가 반복되었다. 그리고 시대가 흐르며 15세기에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와 절대왕정의 시대로 넘어간다. (이후의 대략적인 흐름은 메이드 편에서 이야기했다.) 그래서 중세의 장원 제도라고 하면 보통 영주가 통치하는 농촌 공동체 사회를 생각하시겠지만, 실제로는 장원 한 개가 한 명의 영주의 온전한 소유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토지의 소유권이 귀족부터 농민에 이르기까지 계속 쪼개진 결과, 깔끔하게 한 명이 통치하는 구역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된 것. 하지만 이건 가족 제도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이다. 참고로 오늘의 이야기는 유럽 전체를 어느 정도 꿰뚫는 내용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지역별로 큰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일관되게 적용할 수는 없다. 어떤 지역에선 전통 사회의 모습이 계속 남기도 했고, 꾸준히 자식들한테 뭐든 만들어주고 물려주고 사업이라도 할 수 있게 해 주는 지역도 있었다. 이런 것은 게르만족이 정착한 각 지역의 관습들과 연관이 있다. 근친혼과 상속에 관련된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지만, 중세의 가족 이야기는 아직 끝이 아니다. 다음 연재에서는 일부일처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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