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가족 (2) : 일부일처제와 정부(情婦)와 애인들
2022년 12월 07일 · 오전 12시 00분
1. 일부다처제와 일부일처제 지난 번에 이야기했듯이 유럽은 중세 시대에 들어와서 일부일처제로 변화를 맞이했다. 그리고 이것 역시 기독교가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게르만족은 원래 일부다처제 사회였고, 이건 지구상의 거의 모든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왜냐하면 근친혼과 마찬가지로 일부다처제가 갖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 미리 말해두는데, 필자는 일부일처제 선호자이고, 웹소설 등을 볼 때도 하렘물은 안 좋아합니다. (1-1) 일부다처제의 장점 전 세계의 성공적으로 규모를 이룬 사회와 국가는 (중세 이후의 유럽을 제외하곤) 모두 일부다처제 사회였다. 대체 그 이유가 뭘까?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남성에게의 장점으로는 흔히 진화생물학적 관점이 동원된다. 부인이 많을수록 자신의 후손이 많아지니 생물학적으로 유리하단 것이다. 하지만 최재천 교수님의 말을 빌리자면 생물(각각의 개체)은 의도적으로 이걸 노리고서 번식하진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이건 어디까지나 수학적인 이야기, 결과론적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론 대가족을 통한 노동력 확보라든가, 부와 권력의 표현 같은 이유가 더 큰 것 같다.
20세기 초 청나라의 한 가족 사진. 3명의 아내와 14명의 아이가 찍혀 있다.
그런데 오히려 여성에게의 장점이 더 재미있고 설득력이 있다. 여성은 임신과 출산 때문에, 최소한 1년 이상의 기간 동안 타인에 의해 보호를 받고 생계를 보장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여기서 일부다처제가 '장점'이 될까? 원시사회를 보자. 이 사회에서 '능력 없음'이란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굶어죽는단 얘기다. 아니면 매우 비참하고 굶주린 삶을 살게 된다. 이제 두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가 있다. 남자 A는 능력이 좋아서 매우 풍족한 삶을 산다. 남자 B는 능력이 없고 자기 자신조차도 먹고 살기 힘들다. 그런데 여기서 여자 A가 남자 A와 '먼저' 결혼했다. 여자 B는 남자 B와 결혼하면 둘 다 굶어 죽는다. 이 때 일부다처제와 일부일처제 중 뭐가 더 유리한 결혼제도일까? 전 세계 모든 사회의 기반이 일부다처제였던 이유를 학자들은 이런 이유들로 설명한다. 참고로 인간을 닮은 모든 (침팬지 등) 유인원 사회에도 일부일처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인 일처다부제의 경우 여성의 임신 기간과 가임 연령 때문에 생존상의 장점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에 인간의 욕망과 사회적 성공, 지위, 결혼 동맹, 높은 사망률 등등 다양한 요소가 덕지덕지 붙게 되니, 인류가 일부다처제 사회를 이뤘다는 것은 과연 납득할 만한 일이다. (1-2) 기독교와 일부일처제 이런 상식적인 전통(?)에 반기를 든 세력이 있었으니 역시나 기독교였다. 교회가 일부일처제를 주장한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단순했다. 신약성서의 교리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천 년의 시간 동안 내려온 전통, '권력자가 많은 여성을 차지한다'와 같은 수많은 욕망이 엮인 결혼제도를 과연 종교가 바꿀 수 있었을까? 물론 우리는 결과를 안다.
기독교는 결국 유럽의 결혼 제도를 바꿨다. 기독교는 무려 로마의 종교였고, 프랑크 왕국을 건국한 메로빙거 왕조의 첫 번째 왕인 클로비스가 개종하여 받아들인 종교였다. 그 권위를 생각해 보라. 또한 미신과 종교가 뒤섞인 당시의 정신세계에서, 인간의 도덕을, 죽은 후의 천국과 지옥이란 향방을 결정하는 곳은 다름이 아닌 교회였다. 아마도 채찍(지옥)과 당근(천국)을 번갈아 가며 사람들의 머릿속을 주물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원하지 않았던' 일부일처제가 사회 통념이 되고 가시적 성과를 거두는 데까지 무려 500년이 걸렸다. 즉, 우리에게 '익숙한 중세 유럽'이 시작되던 10세기 전후가 일부일처제가 막 자리를 잡은 시기였던 것이다. 일부일처제를 위해 교회가 도입한 개념 중 하나는 '사생아'였다. 이는 결혼 관계 밖에서 태어난 자식을 말하는 것으로, 동양의 서자(첩의 자식), 즉 조선의 서얼제도와는 다른 것이다. 사생아는 기본적으로는 상속권이 없는 자식이었기 때문에, 권력자들이 일부다처제를 통해 가장 원하던 '후계자'가 될 수는 없었다. 2. 일부일처제의 부작용들 일부다처제와 일부일처제는 부인의 숫자와 관련된 단순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과거 사회에서는 정말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물론 이건 교회나 귀족, 왕들도 처음엔 몰랐겠지만 말이다. (알았다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니.) (2-1) 가문의 몰락 일부일처제가 가져온 단순명쾌한 결과는 바로 귀족과 왕족 가문의 몰락이다. 대가 끊어지게 만든다. 오늘날 수학적으로 계산해 보면, 일부일처제는 '반드시' 대가 끊어지는 제도라고 한다(부계 혈통을 말한다). 여기에 과거 사회의 높은 유아 사망률, 낮은 평균 수명, 열악한 의료 및 위생, 잦은 전쟁과 성인 사망률 등이 영향을 끼치는데, 실제로 중세 유럽의 귀족 가문의 대는 미친듯이 잘 끊겼다. 세계적으로 일부다처제가 많았던 게 과연 이해가 간다.
예컨대 1400년에 잉글랜드에 존재했던 백작령 17개 중, 100년 후에 여전히 그 가문에 의해 유지된 백작령은 3개 밖에 없었다. 이 결과에는 결혼제도가 큰 몫을 했다. 한 연구에 의하면 11~13세기 유럽의 기혼 남성 중 40%가 아들이 없는 상태로 죽었다고 한다. 어떤 가문은 아이가 12명이 있었는데, 연이은 사고와 병으로 아들들이 한 명도 남김없이 다 죽은 귀족 집안도 있었다. 중세 유럽의 왕가들만 봐도 대가 끊겨서 새 왕조가 열리는 걸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양자를 입양하면 되잖아?" 하지만 중세 교회는 이미 양자 입양을 금지(다음 연재에서 다루겠다)했었고, 이건 중세 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일부일처제와 입양 금지라는 조합은 권력자 혈통 단절에 크나큰 역할을 했다. (2-2) 이혼 금지와의 콜라보레이션 게르만족은 원래 남편이 아내를 마음대로 내칠 수 있는 관습을 갖고 있었다. 교회는 이것에 강력하게 반대했는데, 물론 교회가 여성 차별을 반대하기도 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교리적인 이유였다. 한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이 결합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은 신의 섭리이고, 결혼이란 이런 신의 섭리에 의해서 성취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 세상의 사정 따위로는 신의 뜻(결혼의 성사)을 파괴하는 것(이혼)은 불가능하단 것이다. 문제는 이게 앞에서 말한 '일부일처제'와 '입양 금지'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면서, 귀족과 왕들의 대를 싹둑싹둑 끊어버렸단 것이다. (심지어 일부 왕들은 귀족의 힘이 약해지는 걸 노리고 교회 편을 든 것도 같다.)
권력자들은 현재의 아내와의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경우, 이혼 후 다른 여성과 재혼을 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다. 하지만 교회는 절대 반대를 외쳤고, 긴 소송과 재판 후에 결국 이혼이 인정되지 않았으며, 이것 때문에 대가 끊긴 유명한 가문들이 실존한다. 이혼은 중세의 왕들과 교회의 가장 큰 분쟁 사유였다. 3. 일부일처제와 이혼 금지의 순기능 안 좋은 결과에 대해 계속 얘기했는데, 여기서 잠시 당시의 일부일처제와 이혼 금지의 도입이 가져온 순기능을 이야기해 보자. 먼저 일부일처제는 결과적으로 중세 가정의 아이들이 더 집중적인 교육과 투자를 받게 만들었다. 아무리 부유한 가정이라도, 아이가 수십 명 있는 것과 5명 있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권력자가 다수의 여성을 독점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남성들이 훨씬 쉽게 결혼을 하게 되면서, 사회의 범죄율이 떨어졌다는 연구도 있다. 또한 사회의 생산성도 올라갔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중세 이후의 유럽 사회가 (학문과 기술적으로) 도약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이혼 금지는 인권과 관련이 된다. 이혼 금지가 적용되기 이전의 게르만 사회를 보면, 남편들은 굉장히 별 것 아닌 이유로 이혼 통보를 했다. 그냥 '사랑이 식어서' 정도의 이유만으로 이혼을 했는데, 이혼하겠다고 말 한마디만 하면 됐다. 이건 여성의 인생에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교회는 이런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고, 당대의 많은 여성의 삶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인권 신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혼이 금지되자 권력자들은 아내를 죽이기 위한 음모를 획책하기도 했는데, 교회가 이것을 미리 알게 될 경우 절대 죽이지 못하도록 경고를 보내고 교회에서 아내를 보호했다. 교황의 권위는 왕을 협박하기에도 충분했다.
파문 당하고 싶나?
물론 대가 끊기는 일은 권력자 가문에 있어서 정말 심각하고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지만, 이혼 금지가 등장하고 교회가 결혼을 관장한 것에는 선한 이유 역시 충분히 존재했다. 4. 결혼의 해소 그럼 중세 유럽에서 이혼이 아예 불가능했을까? 그렇진 않았는데 그렇기도 하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결혼이 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혼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남편과 아내 모두가 이혼하고 싶다고 호소해도 신의 섭리는 파괴될 수 없었다. 그런데 결혼이 정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단 걸 증명하면 결혼 성립 자체가 '무효'가 된다. 교회에서 결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조건들이 있었다. 이건 중세 안에서도 계속 조금씩 변했지만, 예컨대 지난 연재에서 보았던 7촌 이내의 결혼이란 걸 증명할 경우, 애초에 근친혼이 되기 때문에 결혼이 무효가 된다. 중세 교회의 관점에선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결혼'은 애초에 신의 뜻에 의해 성사된 결혼이 아니었다. 거짓 결혼이지만 인간이 어리석어서 이루어졌다고 착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신의 뜻은 그 안에 없고, 결혼은 없었던 일이 되어야 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서양식 결혼 절차는 이런 이유들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신랑과 신부에게 '사랑을 맹세하고 결혼을 승낙할 것인지'를 묻는 것은, 결혼은 가문이 아닌 당사자간의 합의와 사랑에 의한 것이란 중세 시대 때부터의 (기독교의) 인식이다. '이 결혼에 이의가 있는 분이 계십니까?'라고 묻는 것 역시, 결혼 성립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무효가 될 사유가 있다면 알려달라는 중세 시대부터의 인식 때문이다. 예의상 묻는 게 아니라 진짜로 묻는 것이다. 교회와 권력자의 이혼에 얽힌 싸움은 정말 오랫동안 격렬하게 이어져서, 훗날 교회는 외도나 학대 등 몇 가지 사유를 이혼의 근거로써 인정하게 된다. 5. 정부(情婦, mistress)와 애인의 문제 (5-1) 중세에는 외도는 심했을까? 소문처럼 중세 시대에는 외도가 흔했을까? 흔했다. 물론 모두가 외도를 자유롭게 한 건 아니며, 외도를 하지 않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적어도 12세기에는 외도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행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외도는 흔한 편이었는데, 이유는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일부일처제와 이혼 금지 도입의 부작용일 것이다. 오랜 시간 전통으로 내려오던 일부다처제가 외부의 종교(게르만은 원래 오딘이나 토르 등을 믿었다)에 의해서 강제로 바뀌었다. 그런데 권력자와 민중 모두가 일부일처제를 강력하게 원하지를 않으니, 도덕적인 한계선에서 그치고서 완전한 근절을 가져 오지 못한 것 같다. 완전한 금지가 되려면 제도의 뒷받침이 필요할 것인데, 권력자는 의지가 없고 심지어 교회는 외도가 이혼 사유가 못 된다고 계속 주장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유럽에서 외도는 쉽게 볼 수 있는 사회 문제였고,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애인과 정부를 숨겨둔 사람들은 제법 많이 있었다. 심지어 농민까지도 말이다. (사실 이건 현대에도 근절되지 못했다.) (5-2) 정부(情婦, mistress)의 문제 여기서 많은 분들이 한 번쯤 들어보셨을 법한 이야기, 정부(情婦)가 튀어나온다. 특히나 프랑스 같은 나라는 왕이 '공식적으로' 정부를 두었다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유럽에 후궁과 처첩제가 없었단 건 다 거짓부렁이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면, 유럽 사회는 '공식적'으론 정부(mistress)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문제로 매우 유명한 18세기 루이 15세의 정부 마담 퐁파두르가 가졌던 칭호 메트레상티트르(Maîtresse-en-titre)는 정확히 이야기하면 준공식적인 직함(une position semi-officielle)이었다.
왕실 정부(情婦, royal mistress)는 대략 14세기 정도부터 역사에 나타났고, 프랑스의 메트레상티트르 직책은 15세기 말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왕실 정부의 지위와 공연성은 점점 상승하여, 17세기 후반에는 유럽 왕실에서 '필요한 직책'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평생 손을 대지 않음에도 왕실 정부를 임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18세기에는 고위 관직 수준의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이 때가 그 유명한 정부의 전성 시대이다. 하지만 곧이은 시민혁명과 함께 정부는 몰락했으며, 19세기 이후의 왕의 정부는 유복하지만 화려하지는 않은 소박한 상류층의 삶에 만족해야 했다. 이런 왕실 정부는 영어권에서도 종종 '공식 정부(official mistress)'라고 번역된다. 하지만 '공식적인 정부'라는 게 떳떳하게 인정받았다면, 왜 정부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켜서 부부인 척 가장하게 했을까? 왜 어떤 시대에는 동행하는 수행원이나 다른 사람인 척 연기를 하라고 요구하기도 했을까? 특히 어느 시대에나 왕과 정부의 관계는 도덕적으로 지탄받았다. 그 수많은 왕의 애인들은 항상 구설수에 올라왔고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 당대의 문인들 역시 '천박하다'고 수도 없이 묘사를 했다. 사실상 눈 가리고 아웅인 공공연한 직함이지만, 참 모순적이게도 유럽 사회에서 윤리적으로는 용인되지 못하는 부도덕한 관계였으며, 대다수가 여기에 동의를 했다. 지옥에 가기 싫었던 걸까?
제가 외도를 하기는 했지만 고해성사도 했고 교회에 기부도 하고 면죄부도 샀습니다. 그러면 전 연옥에서 잠시 고통받은 후에 결국엔 천국에 가겠죠?
정부의 공연성은 시대에 따라, 왕의 힘에 따라 차이는 있다. 하지만 결국 이걸 완전하게 공식적인 것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정부는 결국 가족 제도의 밖에 있는 존재였고, 동양과 달리 첩도 후궁도 아닌 그저 내연 관계의 '남'이었다. 도덕적이지 못한 관계였고, 왕의 관심이 식으면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고 궁 밖으로 내쳐졌다. 하지만 감히 강력한 권력을 쥔 왕에게 대놓고 이런 얘기를 할 정도로 간이 튀어나온 자는 없었을 것이다. 정부는 전통적인 일부다처제와 강요 받은 일부일처제, 원치 않는 정략 결혼, 권력과 시대의 흐름 등이 합쳐져서 나타난 독특한 모습인 걸로 보인다. 또한 권력자, 특히 왕의 경우 후계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외도를 해도 사회적으로 쉬쉬 하고 지나가는 경향도 있었다고 한다. 사생아는 후계자가 되지 못하는 게 원칙이지만, 이런 속세의 문제는 여러 가지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영국 왕실을 세운 정복왕 윌리엄 역시 사생아였고, 루이 14세의 사생아 루이 오귀스트도 결국 왕이 되진 못했지만 왕자로서 인정받았다. 중세 이후 실제로 왕이 된 사생아는 (아마도) 없지만, 법적으로 인정받아(legitimized) 공작 등 귀족 작위를 받은 자는 많으며, 그들을 일종의 보험이라고 생각한 시대도 있었다. 6. 마치며... 일부일처제와 관련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았다. 거의 매번 이야기하는데, 중세 전체를 관통하는 개념이지만 지역마다, 시대마다 차이가 있다. 필자가 이 연재를 하는 이유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한 가지 일관된 사고 방식이 수백 년은 커녕 수십 년조차 온전히 이어지는 사회란 없다. 계속해서 시대와 함께 변하고, 예를 들어 정부(mistress)의 문제도, 어떤 시기에는 더 관용적이게 되었다가, 어떤 시기에는 더 엄격해졌다가 하는 것이 인간의 사회다. 특정 시기의 특정한 면만을 보고서 그게 마치 수백 년 간 모든 지역에서 그랬다는 듯이 생각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다. 이건 대표적으로 중세 혐오자들이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다. 더불어서 창작물에서 주인공이 5천 년만에 깨어났다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야 하는 게 정상이다. 신석기 시대 농경 사회를 이룬지 이제 약 1만 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천 년이란 엄청나게 긴 시간이다. 마지막으로 정리를 하자면, 11세기부터는 사람들은 일부일처제를 확실하게 '기본적인 결혼제도'라고 생각했고, 외도를 하고 애인을 갖는 사람들을 '윤리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게 어디까지나 '사회의 기본'이었으며, 중세가 끝나고도 다시 500년에 걸쳐 현대 사회를 향해 점진적으로 변화했다. 다음 연재에서는 마지막으로, 중세 교회가 만들어낸 '영적인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겠다. 긴 내용은 아니고 지금 하는 이야기의 부록 정도로 봐 주시면 좋겠다.
▶[중세의 가족 (3) : 기독교의 영적인 가족]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