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가족 (3) : 기독교의 영적인 가족
2022년 12월 10일 · 오전 12시 00분
1. 대부와 대모 '대부(代父)'라는 유명한 영화 제목을 보자. 영어로는 'Godfather'. 즉 신적인 아버지를 이야기하는데, 바로 기독교가 만들어 낸 영적인(Spiritual) 부모 제도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기독교의 성사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세례가 있다. 예전에 [중세인의 삶과 교회]에서 유아 때 받는 세례는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매우 중요한 의식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원래 초기 기독교에선 이교도가 입교를 하면서 기독교도를 후견인으로 세우던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갓난아기가 세례를 받을 때 아이의 미래의 신앙을 보증하는 사람을 내세우는 관습으로 변화한 것이 바로 대부모 제도이다. 유아 세례식에서 후견인은 갓난아이를 대신해서 신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신앙 보증을 한다. 이후 아이의 인생에서 대부모는 아이의 종교적 지도자로서 올바른 신앙 생활로 이끄는 책임을 져야 했다. 중세 초기에는 이 역할을 보통 친부모가 맡았지만, 9세기 초부터 교회에선 친부모가 이 역할을 맡는 것을 금지했다. 이후로 부모들은 아이의 영적 후견인 자리를 신뢰할 수 있는 사람, 혹은 지역의 더 높은 사람에게 맡기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대부모(代父母), 즉 Godparent이다.
2. 친가족 관계를 약화시켰던 기독교 중세 유럽에선 태어난 직후에 세례를 받고서 기독교인이 되는 게 당연했다. 교회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기독교 공동체에 집어넣으려고 애썼는데, 이 과정에 대해 학자들이 평가하는 것을 보면 재미있다. 기독교는 기존의 가족 관계, 즉 확대가족만이 아니라, 친부모자식 관계까지도 약화시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관계인 친가족을 종교적 관계로 대체함으로써, 그 관계에 파고 들어가고 싶었던 것 같다.
가족의 약화는 교회에게 여러모로 이익이었다. 피로 이어진 가족보다 종교적인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고, 속세의 삶보다 종교에 더 헌신하게 만든다. 가족이란 근본적인 관계를 통해 교리를 넓고 깊숙하게 퍼트리기에도 유리했을 것이다. 또한 가장 종교적 삶을 실천하고 있는 사제들에 대한 존경심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어떤 책에선 '교회가 의도적으로 가족 관계 약화를 노렸다'라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일처제와 근친혼 금지 등의 변화들이, 모두 귀족 가문의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었으며 치밀한 음모였단 주장도 있다. 하지만 교회가 의도적으로 왕과 귀족의 대를 끊고자 했다는 식의 주장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한다. 교회가 왜 이런 변화들을 집요하게 실행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교회는 결국 친부모 자식 이외의 가족 형태를 무너트리고서 기독교식 가족의 모습을 성공적으로 도입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문'과 '개인'을 분리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가족 집단을 그 이전 시대보다 약화시켰다. 교회가 중세 가족에 뿌리를 내리고 가정 법원의 기능까지도 담당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3. 대부모 제도 그런 와중에 중세 교회가 원했던 '종교적 가족'이란 새로운 개념이 바로 대부모자식 관계였다. 교회는 대부모(代父母)와 대자녀(代子女)를 실제 가족과 같은 개념으로 인식했기에 근친혼 금지 관계에도 포함시켰다. 그래서 중세의 부모들은 자녀의 대부모를 선택할 때 중요하고 신뢰할 수 있으면서도, 결코 결혼할 일은 없는 가문을 고르기 위해 머리를 싸매야 했다. 세례식에 참석한 대부모는 친부모 대신 아이의 신앙을 보증했으며,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는 문화가 생기기도 했다. 이후 대부모는 아이의 인생에서 중요한 후견인이자 보호자가 됐고, 아이를 영적으로 지도하며 기도와 신앙,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았다. 대부모는 보통 세 명 이상(남녀 한 명씩과 같은 성별의 추가적인 한 명)이 지정되었는데, 12세기까지는 대부모 숫자의 제한이 없었다.
19세기 말의 세례식.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이 대부모이다. 대부모 문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이렇게 기독교는 신앙으로 연결된 영적인 가족을 만들어 냈고, 교회는 이것이 가장 순수한 관계라고 외쳤다. 대부모 제도는 친족 관계를 일정 부분은 약화시켰으며, 사회는 영적으로 더욱 통합되었다. 사회 전체가 기독교로 얽혀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 공동체로부터의 축출을 의미하는 파문(expulsion)이 (교회가 뭐라고 생각하든) 가장 위협적인 협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대부모는 원래는 종교적인 후견인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적, 경제적 원조를 하는 관계로 변해갔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 후견인이 되어, 부모를 잃은 아이를 대부모가 보호해서 키우기도 했다. 이후 지역의 유지가 최대한 많은 아이의 대부모가 되는 것이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 되었던 시기도 있었다. 이렇게 대부모제도는 서서히 변질되었고, 오늘날에 와서는 서양 사람들도 대부/대모가 원래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게 된 것 같다.
4. 입양 금지 입양 제도는 전 세계 거의 모든 문화권에 고대부터 있던 제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후계자가 없을 땐, 주로 친척이나 혈족의 자식을 양자로 들여서 가문의 대를 잇곤 했다. 중세 초까지만 해도 유럽엔 분명히 양자 입양 제도가 있었다. 하지만 중세의 교회는 입양을 금지했다. 기독교의 입양 금지를 직접적으로 설명한 책을 아직 보지는 못했으나, 여러 간접적 설명을 통해 추측하건데 아마도 다음과 같은 이유였을 것 같다.
① 교회는 어머니는 스스로 낳은 아이를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고, ② 혈통 밖의 아이와의 연결은 '영적인 가족'을 통해서 이루고 싶어 했다. ③ '가족 제도'를 교회의 완전한 관할 하에 두길 원했다. ④ 또한 의심스러운 부분은 있으나, 귀족의 가문이 끊기는 문제에 대해 어느 시점부터는 인지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교회는 대가 끊긴 귀족 가문의 재산을 교묘하게 손에 넣곤 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중세 시대에는 입양이 금지되었다. 이것은 게르만의 혈통 중시의 문화와도 잘 맞았던 것 같다. 모든 법전에서 입양이란 말이 사라졌고, 일부일처제, 이혼 금지, 사생아 등의 새로운 개념들과 함께, 귀족 가문들의 대를 끊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그래서 '중세'라고 스스로 칭하는 창작물에서 양자나 입양 제도가 나오면 고증 오류이다. 그럼 고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중세의 고아들은 기본적으론 교회에서 맡아서 길렀다. 대부모와 법적 후견인 제도도 있었다.
중세 사회엔 상당히 재미있는 모습이 존재했는데, 노인들이 자신을 돌봐줄 사람과 '노후에 돌봐준다는' 계약서를 작성했다는 것이다. 이건 주로 친자식과 맺은 계약이고, 매우 드물게 친자식이 아닌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계약의 대가는 돌봐준 사람의 이름을 유언장에 넣어주는 것이었다. 계약서의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었는데 '매일 어떤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식의 사항들이 조목조목 들어 있었다. 자식 이외의 사람과 계약을 맺는 경우, 사실 상의 양자와 비슷한 관계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후계자로 인정되지는 않았다. 유언으로 재물을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가문의 이름을 잇거나 작위 계승자가 될 수는 없었다. 중세 때 사라진 법적 입양은 프랑스에선 1892년에, 영국법에선 1926년에 다시 등장했다. 오늘날 서양의 미덕처럼 보이는 입양 제도는 18~19세기까진 서구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5. 유럽의 가족 연이은 세 개의 연재에서 중세 유럽의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았다. 중세가 시작되고서 500년 후, 서기 10세기의 중세는 근친혼 금지, 일부일처제, 이혼금지, 입양금지, 대부모제도와 같은 변화를 맞이했다. 이것은 프랑크 제국의 멸망, 이민족의 침입, 개척 열풍, 흑사병의 창궐과 같은 수많은 다른 요소들과 우연히 엮이면서 유럽을 변화시켰다. 그런 중에 유럽의 가족은 흩어지고, 몰락하고, 혈연이 아닌 자들을 가구의 중요 구성원으로 활용하고, 다시 모이고, 문제점을 보완하고, 새로운 부작용을 겪으며 중세 후반부 500년을 통과했다. 이런 변화는 단순히 가족의 형태만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다. 유럽 사회가 더 넓은 영역을 서로 오가며 교류하게 만들었고, 자치 도시의 부흥과 길드의 탄생, 개인주의, 합리주의, 개방적 자세 등 다방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도 말해진다.
이후 유럽의 가족은 절대왕정 시대와 종교개혁, 부르주아 혁명, 산업 혁명, 농업 혁명, 세계대전 등을 거치며 현대 가족으로 변화했다. 이것들은 유럽을 넘어 미국으로 전해졌고, 이제는 전세계에 퍼졌다. 결국 오늘날의 '서구식 가족 제도'는 1000년에 걸친 교회의 노력과 다른 수많은 사건들의 합작품이다. 하지만 현대 가족은 교회가 원했던 모습과는 다르다. 현대 민주 국가는 신의 뜻이 아니라, 합리적 사고와 민주주의에 의해서 법률을 제정한다.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한다. 현대가 되면서 기독교가 절대적으로 반대했던 제도들을 법률적으로 허용했는데, 예컨대 임신 중절과 입양의 허용은 교회가 그토록 없애려고 했던 높은 유아 살해율이나 유기 행위를 거의 다 없앴다. 이혼의 허용은 아내를 시장에서 파는 행위 같은 것들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렇게 기독교가 만들어 내고 현대식으로 재정립된 '서구식 가족' 제도는 전 세계로 확산되었고, 계속 확산되는 중이다. ※ 필자는 역사적 사실을 나열한 것 뿐이니, 부디 이곳에서 정치적 의견의 목소리는 내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디까지나 현대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정치 이야기가 홈페이지에 등장하는 걸 정말 싫어합니다.
6. 마치며... 개인적으로 유럽사를 보고 있으면 참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유럽 인구의 최대 3분의 2를 죽인 흑사병조차도, 그 타이밍에선 유럽이 다음으로 도약하는 데에 사회적으로 기여한 면이 없지 않다. 단지 그 오랜 세월 동안의 그 수많은 역경이 행운으로 전환되는 모습을 보면, 단순한 운이 아니라 유럽 사회의 저력일 것도 같다. 운도 실력이라고 하기도 하고 말이다. 10세기 전후로 시작된 유럽 가족의 격변은 당대엔 엄청난 진통을 낳았지만, 그것이 결국 근대 유럽을 만드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결국 나중에 보면 다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을 먹었다.
참고로 필자가 의도적으로 기독교 이야기를 계속 꺼내는 게 아니란 걸 밝혀두고 싶다. (과거 사회가 다 그렇지만) 종교를 제외하면 중세라는 시대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연재 초기부터 종교를 설명한 이유이기도 하다. 필자는 기독교 이야기를 일부러 자주 꺼낼 생각도, 미화할 생각도, 폄하할 생각도 없다. 설명할 때 필요하면 이야기할 뿐이다. 이번 가족 제도와 관련해서는 교회의 선한 의도를 제법 이야기했지만, 부패한 모습 역시 많았다. 가령 이혼 금지가 되자 결혼 해소를 위해서 권력자들이 고위 성직자들에게 줄을 댔는데, 이건 면죄부와 함께 중세 교회의 부패를 굉장히 가속시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중심엔 '선함'도 있었다. 전 세계 민주 국가가 모두 빠짐없이 부패해 있지만, 그 안에서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란 대원칙만큼은 (적어도 아직은) 지키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인간 사회란 게 그런 것 아니겠는가. 가족 제도에 포커스를 맞춘 연재는 이걸로 끝이지만, 아직 중세의 가정과 가구의 모습에 대해서는 끝나지 않았다. 다음 연재에서는 '거주지로서의 중세의 성(castle)', 즉 중세의 상징인 성과 그곳에서의 삶에 대해서 다루어 보겠다.
▶[거주지로서의 중세 유럽의 성 (1) : 유럽의 성(城)]로 이어집니다.◀
근황 보고 2023-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