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3회 홍백가합전
2023년 01월 11일 · 오전 12시 00분
저는 TV를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안 보게 되었는데, 적어도 최근 10년 동안 제 의지로 TV를 켜서 어떤 프로그램을 본 일은 다섯 손가락을 채우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홍백가합전을 빼면요. 홍백가합전은 일본에서 매년 12월31일에 방영하는 연말 방송입니다. 꽤 역사가 깊은 방송으로 예전엔 거의 모든 일본인이 한 해의 마지막을 홍백가합전과 함께 보냈었죠. 이미 홈페이지에서 몇 번 홍백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설명을 하는 것 같네요. 우리나라에서 청군과 백군을 나누는 것처럼, 일본은 홍군과 백군을 나눕니다. 그래서 홍백(紅白), 노래는 한자로 가(歌), 합전(合戦)이란 일본어로 두 세력이 정면으로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겨울의 눈싸움을 유키갓센(雪合戦)이라고 하죠. 그래서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戦, 고하쿠우타갓센)이란 홍팀과 백팀이 노래를 갖고서 겨루는 연말 방송입니다. 무려 1951년부터 NHK에서 매년 방영하고 있으며, 가수들 중에는 홍백에 한 번이라도 나오는 게 평생의 꿈이었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이미지 출처 : https://www.nhk.or.jp/kouhaku/ 작년에는 백팀이 이겼습니다. 홍백에서 결과는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요.
제가 홍백을 보는 이유는 원래는 일본에서의 추억 때문이기는 했습니다만, 그 이후로는 일본과 저를 연결하는 일종의 마지막 끈을 쥐고 있단 느낌으로 보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일본 사회의 모습을 잘 알지 못하지만, 일본 가수들을 찾아 보지도 않지만, 1년에 한 번 보는 홍백가합전은 지난 1년의 일본 가수와 일본의 모습을 짧게나마 저에게 알려주는 그런 느낌이었죠. 지난 몇 년 간은 홍백을 한 번쯤이나 겨우 봤던 것 같습니다만, 올해는 처음으로 별 무리 없이 홍백을 봤습니다. 사실 다시 볼 마음이 안 들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긴 했는데, 막상 다시 보니까 나름대로 재미있네요. 이번에 홍백을 보면서 뭐랄까 참,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방송을 볼 나이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년 30년 전에 알던 배우들이나 가수들은 다 나이가 들어서 중견~원로급이 되었습니다. 라르크의 하이도나 요시키는 노년 전의 마지막 활동이란 느낌이었고, KinKi Kids는 더이상 '키즈'가 아니게 되었죠. 퍼퓸은 (물론 잘 모르고서 그냥 생각한 겁니다만) 처음엔 뭔가 한국식 아이돌붐에 편승한 애매한 가수들이다 싶었는데, 이제는 관록도 붙고 자신들의 스타일이나 실력이나 뭐하나 떨어지지 않는 가수들로 성장했더군요. 20년 전에만 해도 '요즘의 새로운 가수'란 느낌이었던 유즈도 이젠 늙었고요.
타마키 코지씨는 백발이 돼서 멜로디와 I Love Youからはじめよう를 불렀습니다. 안전지대 멤버 한 분은 작년 12월에 별세했다더군요.
하이도X요시키X스기조X미야비 의 꿈☆의 콜라보 록밴드 ...인데 솔직히 자기 멋에 겨워서 이상한 음악을 한단 느낌이었습니다. 정신차려라 요시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방송을 봤고, 다른 기억에 남는 가수들도 있었지만, 이 분이 나오고서 모든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시노하라 료코(篠原涼子)씨의 1994년 히트곡이었던 '그리움과 애절함과 듬직함과(恋しさと せつなさと 心強さと)'였죠. 와, 설마 이 노래를 홍백에서 다시 들을 날이 올 줄이야... 당시에 정말 엄청나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죠. 심지어 무대에서 함께 반주를 넣었던 건 TK(코무로 테츠야) 본인이었습니다. 으아... 고생을 많이 했는지 얼굴이... 코무로씨 ㅠ
참고로 시노하라씨는 2003년 이후 가수 활동은 사실상 접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홍백은 기-승-전-시노하라 료코, 로 기억되었습니다. 아니었다면 타마키 코지씨와 쿠와타 케이스케씨가 기억에 남았겠지만... 정말 추억 돋네요 ㅎㅎ 저 노래는 토요일 쯤 가사를 올려 보겠습니다. 이번 홍백이 아니었으면 영원히 안 올렸을 듯한 가사이긴 합니다만:)
홍백가합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