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城) 이후의 거주지 : 저택
2023년 06월 15일 · 오전 12시 21분
1. 다시 저택으로... 9~10세기 이전까지 게르만 귀족들은 주로 로마식 빌라(villa) 같은 저택에 살았다. 그러나 봉건 사회가 들어서며 방어와 권위를 위해서 성으로 주거지를 옮겼고, 성은 결코 좋은 주거 환경이 아니었다. 15세기 중세가 끝나면서 대포의 발전으로 성의 방어력은 가치를 대폭 잃었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자신의 영지보다 수도와 도시로 눈을 돌렸다. 국가 내부의 정세가 안정되어 영지 단위의 내부 전쟁이 거의 사라진 것 역시 중요한 이유였다.
이미지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Knole Knole as viewed from the grounds. Taken as a 5 segment panorama with a Canon 5D and 70-200mm f/2.8L lens. by Diliff, CC BY-SA 3.0
▲ 15-17세기에 걸쳐 지어진 영국의 대저택인 놀(Knole). ▲
중세의 저택은 성처럼 방어 시설이 지어진 경우가 많다. 그 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대부분의 저택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수백 년에 걸쳐 증축되고 개축되었다.
이제 귀족들은 다시 저택으로 터전을 옮겼다. 이런 저택을 보통 manor house라고 불렀다. 왕 역시 다시 궁전(palace)으로 옮겨갔다. 성은 다른 용도의 시설로 전용되거나, 파괴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도시가 더욱 개발되고, 특히 18세기에 사교 시즌과 모임이란 개념이 생기면서, 도시에 마련한 귀족 거주지를 타운하우스(프랑스에선 오뗄 파티큘리에)라고 부르게 되었다. (참고로 그 이전까진 타운하우스는 단순히 도시의 집을 이야기했다.) 이에 대응해서 교외에 있는 귀족의 대저택은 컨트리 하우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단어만 보면 '시골 집'인데 근대 영국에선 진정한 상류층 귀족의 상징이었다니 재미있다.
이미지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Hatfield_House Hatfield House, Hertfordshire, England, by Allan Engelhardt - Hatfield House, CC BY-SA 2.0 17세기에 영국에서 지어진 컨트리 하우스인 햇필드 하우스(Hatfield House).

2. 홀에서 응접실로, 거실로...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성과 저택의 관계라기보다는, 홀에서 프라이버시를 위한 공간이 떨어져 나오는 과정이다. 그래서 중세 말 성과 근세 초 저택에서 공존하던 시대가 있었다는 점을 우선 밝혀둔다. 앞서 말했듯이 그레이트 홀은 다목적 공간으로 식사부터 생활과 사무, 회의, 잠자리까지 모든 것을 다 하던 공간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사생활이 중시되면서, 솔라 같은 귀족들 개인의 방이 생겨났다.
길링 성(Gilling Castle)의 그레이트 챔버. 방 자체는 16세기에 만들어졌으나, 위의 이미지는 20세기 초의 모습이다.
그러다가 홀보다 '조금' 더 사적인 공간이 생겨났는데, 바로 그레이트 챔버(Great chamber)다. 이 공간은 완전히 공용이던 홀보다 조금 더 개인적인 공간으로, 귀족 가족이 하인과 어느 정도 분리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으며, 때로는 손님을 대접하는 데에 쓰이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확실히 성이 있던 시대이다. 이후 (여전히) 성과 저택 시대 양쪽에 걸쳐서 새로운 공간이 나왔는데 바로 '응접실'이다. 영어로 팔러(Parlour)라고 하는 방으로, 원래는 중세 수도원에서 따로 대화를 나누기 위한 공간이었다. 팔러(응접실)는 손님을 맞기 위한 공간이었다. 홀처럼 공개된 공간이 아니라, 손님과 주인 가족의 사적인 공간이었다. 손님과의 대화만이 아니라 식사, 나아가서는 가족의 장례식 같은 행사에까지도 이용되었다. 이런 용도는 시대의 흐름과 함께 조금씩 달랐다.
벨기에 브뤼셀 왕궁의 살롱. 팔러의 프랑스어가 바로 살롱(Salon)이다. 저택 등의 응접실이나 방을 뜻하는 말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드로잉 룸(drawing room)이 등장한다. 초기의 이름은 위드드로잉(withdrawing) 룸으로, 식사를 하고서 물러나기(withdraw) 위한 방이란 뜻이었다. 재미있게도 이 방은 식당에 남성들을 남기고 여성들이 물러나기 위해 기능한 시대가 있었다. 식사를 하고 손님과 이동하는 접대 공간은, 오늘날엔 거실(living room)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팔러와 드로잉룸은 거실의 전신(前身)이다.
이미지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Parlour A Greek Revival parlour in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by Andrew Balet, CC BY 3.0 19세기의 팔러.
홀에서 응접실이란 개념이 분리되고, 여기에 다시 '가족을 위한 공간'이란 개념이 더해지면서 20세기 초~중반의 리빙 룸으로 변모했다. 어떻게 보면 그레이트 챔버와 응접실의 기능이 다시 합쳐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3. 식당의 등장 홀에서 다 같이 식사를 하던 시대는 주인과 하인의 공간이 나뉘면서 저물었다. 중세 후기에 귀족들은 보통 각자의 방에서 개별 식사를 했다. 때로는 그레이트 챔버 같은 공간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다. 팔러(응접실)가 등장한 이후, 손님을 맞이하면서 자연스럽게 팔러가 식사를 하는 공간으로도 변했다. 혹은 식사를 하기 위한 응접실이 따로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식당이라고 부르진 않았다. 식당, 즉 다이닝 룸(Dining room)이 독립 공간으로 보급된 건 18세기 즈음이 되어서다. 식사를 위한 전용 공간이 등장했고, 이 시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족들이 다시 모여서 '가족 식사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귀족과 평민 모두 말이다. 그레이트 홀에서 가족들이 흩어진 이후 수백 년만이다.
4. 하인을 위한 공간 예전에 [중세의 가구, 그리고 집사와 마구간지기]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중세 초에는 하인들은 주인 가족의 일부로서 함께 생활했다. 하지만 12~13세기에 주인과 하인의 공간이 분리되어 가면서, 주인 가족은 자신의 방에서 생활하게 되었지만 하인을 위한 공간은 일반적으로 없었다. 하인들은 홀에서, 지붕 밑이나 다락에서, 지하실에서, 심지어 마구간에서, 벤치에서, 말 그대로 적당히 자고 생활했다. 이런 하인들을 위한 '전용 공간'은 굉장히 오랜 시간 후에 마련되었다. 18세기 즈음 하인을 위한 공간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복지를 위한 목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인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우기 위한 목적은 확실히 있었다. 18~19세기, '바람직한 하인'이란 주인이나 외부인의 눈에 띄지 않은 채, 저택의 기능만을 담당하는 일종의 '가사 요정'이었다. 특히 눈에 띈다면 남자 하인이 눈에 띄고, 여자 하녀는 눈에 띄지 않는 게 바람직했다. 하인의 공간은 저택의 뒷편, 지하, 혹은 최상층 같은 곳에 배치되었는데, 규모가 커서 별채로 나뉘더라도 정면에선 보이지 않는 위치에 배치되어 갔다. 저택 내부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 하인이 다니는 전용 통로가 따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인의 공간은 오늘날 기준으로는 보편적으로 어둡고 습했고, 그나마도 상급 하인이 아니면 공동 생활을 했다. 단지 필자가 읽은 책에 의하면, 그런 하인 생활조차 농촌 좁은 집에서 수많은 형제들이 부대끼면서 지내던 환경보단 나았다고 하니, 21세기 선진국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5. 마치며 : 그레이트 홀의 운명 이렇게 주거 공간은 성에서 저택으로 옮겨갔으며, 다목적 공간이었던 그레이트 홀은 다양한 방들에게 기능을 하나둘 빼앗겨갔다. 위에서 다 다루지 못했지만, 저택 시대가 되면서 엔터테인먼트 룸, 음악실, 도서관 등의 기능을 가진 방들이 등장하고, 무도회를 위한 볼 룸(ballroom)까지 등장하면서, 그레이트 홀은 그야말로 대부분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18세기 무렵부터는 오늘날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서양의 홀, 즉 현관문을 들어가서 바로 보게 되는 저택의 입구이자 현관이자 통로로서의 홀로 남게 된다. 중세의 성에서 모든 것이 가능했던 메인 공간이었던 걸 생각하면 초라한 모습이다.
이미지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Belton_House The Marble Hall, by Richard Croft, CC BY-SA 2.0 17세기 말의 저택 벨턴 하우스(Belton House)의 마블 홀. 현관문으로 들어가자마자 있는 홀이다.
결국 중세 유럽 특유의 '요새화 된 개인 거주지'인 성(castle)은, 제국의 붕괴와 혼란한 내부 사정, 외적의 침입과 잦은 전쟁 등의 배경과 함께, 기독교의 확산으로 인한 전통 가족의 붕괴와 새로운 사회의 모습이 혼합된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다. 성은 약 10~11세기 무렵부터 15세기까지 지속되었고, 그 이후 안정기에 들어간 유럽에서 권력자들은 성을 떠났다. 남겨진 성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극히 일부만이 살아남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사실 '주거지로서의 성' 시리즈는 앞에서 했던 '중세의 가족' 시리즈를 마무리 짓는 연재로 기획되었었다. 문제는 6개월이란 공백이 있다 보니 처음에 떠올렸던 여러 연결점들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조금 더 자세히 다루고 싶었지만 분량 등이 애매해서 다루지 못한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 추운 지역에선 오늘날의 라지에이터와 비슷한 보일러가 등장했는데, 나중엔 타일과 보석으로 장식해서 굉장히 예쁘게 만들었다. 그 외에도 중세 때는 무도회가 없었단 이야기 같은 것도 하고 싶었는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로판의 사교계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마 내년쯤 되지 않을까 싶다.
독일의 18세기 저택인 슐로스 파보리트(Schloss Favorite).
다음 연재에서는 성 연재의 부록으로 '성(城)과 감옥'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중세 성의 거주탑이었던 돈존(donjon)이 지하감옥 던전(dungeon)이란 단어가 된 이야기를 포함해서 말이다.
▶[중세의 감옥 (1) : 중세의 감옥에 대한 오해]로 이어집니다.◀
잡담 2025-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