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감옥 (1) : 중세의 감옥에 대한 오해
2023년 07월 01일 · 오전 12시 00분
0. 현대인이 감옥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 중세와 같은 과거의 감옥을 이야기할 때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현대인에게 감옥은 너무 친숙한 존재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범죄자나 죄수를 '감옥에 가두는 것'은 가장 흔하고 상식적인 행위이다. 감옥이란 죄수를 가둬두기 위한 시설이며, 벌금형보다 무거운 수준의 보편적인 형벌의 수단으로 쓰인다. 이것이 너무 당연해서, 과거의 역사에서도 인류가 죄인을 같은 방식으로 다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상하셨겠지만 당연히 그렇지 않다.
감옥과 징역형(혹은 금고형)이란 발명품은 여러 가지가 얽혀서 만들어진 근대적 개념인데, 대표적으로 인권에 관한 문제가 얽히고, 그렇게 늘어난 수감자를 수용해야 할 시설에 대한 문제가 얽히며, 죄수를 부양할 수 있는 경제력이란 문제 등이 얽힌다. 근본적인 문제는 '애초에 죄인을 가두는 이유가 무엇인가?'란 것인데, 중세 유럽의 형벌과 감옥에 대해서 먼저 살펴 보자.
1. 중세의 감옥 중세 시대에는 '감옥에 가둬 두는 형벌'이란 것이 없었다.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귀족이 아닌 자를 장기간 가두는 형벌'이란 없었으며, 조금 다른 방향으로는 '죄수를 가둬 두는 격리된 전문적인 공간'이란 개념이 희박했다. 사람을 가두는 공간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중세가 현대 수준의 법치(法治) 사회는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신의 뜻 아래에서 정의를 구현하고 법과 관습에 의해 판결을 내리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왕과 영주도 관습과 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행동하기는 어려웠다. 중세의 재판은 가볍게는 영주의 가신에 의해 약식으로 행해질 수 있었지만, 영주가 직접 재판정을 정기적으로 열었으며, 영토를 순방하는 왕 역시 왕의 재판소를 열었고, 나중에는 순방 재판소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열렸다. 재판에 회부된 자는 빠르게 재판을 받을 수도 있지만 매우 오래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geograph.org.uk/photo/4281524, Michael Garlick, CC-BY-SA 13세기에 지어진 스코틀랜드 던스타프니지(Dunstaffnage) 성의 방. 감옥이 아닌 그냥 방으로, 죄수 역시 갇힐 수 있었을 것이다. 중세 성이란 게 견고한 돌덩이의 속이라는 걸 잘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재판을 기다리는 피고를 어딘가에는 가둬 둬야 했다. 그건 단순히 헛간일 수도 있고, 혹은 성 안의 사용하지 않는 방일 수도 있었다. 중세의 감옥이란 건 '임시 구류소(jail)', 즉 오늘날의 '유치장'이나 '구치소'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장기 수감 감옥(prison)―교도소란 개념은 전근대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죄수를 가두는 일이 흔한 사회였다면, 통치자의 개인 거주지인 성이란 작은 건축물에 대량의 죄수를 장기간 가둘 공간이 있을 리가 없다. 자기 집에 죄수들을 잔뜩 가둬 두고서 먹여 살릴 생각을 할 리가 없다. 전문적인 감옥 시설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중세엔 그런 건 거의 없었다.
2. 죄수가 받게 되는 형벌 그럼 '감옥에 가두는 형벌'이 없었다면 과거에는 죄수를 어떻게 처벌했을까? 가장 흔한 예로는 공개된 마을 광장 같은 곳에 죄수를 묶어서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광고하며 방치하는 '모욕형(shaming)' 같은 게 있다. 이건 상당히 흔했던 중세의 경범죄 처벌 방법이다. 이때 죄의 경중이나 혹은 대중의 판단 하에 쓰레기나 돌맹이에 맞을 수도 있고, 더 심한 처벌의 경우 대중의 돌팔매에 맞아 죽는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흔했던, 조금 더 중대한 처벌 방법으로는 신체 절단이 있다. 이건 지역과 시대에 따라 꽤 차이가 있긴 한데, 예를 들어서 절도범의 손을 자르는 형벌이나, 간음한 유부녀의 코를 자르는 형벌 등이 그 예시다. 신체훼손은 (지역 차는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흔하게 자주 채택된 처벌법이고, 코나 귀, 눈과 같이 잘 보이고 숨길 수 없는 부위를 선호했다.
중세의 모욕형(shaming)과 형틀(pillory). 우측 사람이 계란을 던지고 있다. 이 형틀은 이후의 시대까지도 계속 이어지는 유명한 기구이다. 책이나 영화 속 이야기에도 자주 등장한다.
추방형 역시 흔했다. 마을이나 영지나 도시에서 추방되는 형벌인데, 별 거 아니어 보이지만 목숨과 연관된 형벌이다. 중세 시대에 왜 농민이나 농노 들이 영주의 통치 아래에 모여 살았을까? 군사력을 가진 귀족의 영토가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 영지 밖으로 추방되면 가장 먼저 맹수의 습격에서 밤을 넘겨야 하고, 도적과 납치범, 살인자들로부터도 살아남아야 한다. 심지어 신체 절단 후 추방형에 처해졌다면? 잘은 몰라도 대부분 죽었을 것이다. ※ 참고로 중세 봉건 사회가 '농민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같은 관계라고 하는 이유도 이것과 연관된다. 농민과 영주의 관계는 '보호를 대가로 싸울 권리를 포기하는 계약 관계'인 것이다. 그렇기에 '국왕의 소유물'이자 '영주의 땅'인 영지에 머물 수 있다. 저런 사회 배경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나오고 오늘날의 현대 국가로도 일부 개념이 이어진 것이다. 그 외로 벌금형도 흔했고, 동양의 곤장처럼 물리적 체벌로 끝나는 형벌도 있었으며, 사형 역시 오늘날보다 훨씬 쉽게 행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나 다 죽인 건 아니지만 말이다. 사형은 흔했지만 중세를 폄하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정도로 흔하진 않았다.
과거엔 상당히 흔했던 신체절단형(mutilation). 필자가 읽은 책 중엔 베네치아 쪽이 도둑 손을 자르기를 참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문신이나 낙인이 죄인을 나타내는 표식으로서 몸에 새겨졌다. 주로 얼굴 같은 매우 눈에 띄는 장소에 많이 새겨졌는데, 문신의 이미지가 오랫 동안 나빠 온 이유는, 역사적으로 죄인과 범죄자의 표시로 사용된 기간이 길었기 때문도 있다. 과거의 범죄자들은 몸이 잘려 있든, 죄인의 표시가 새겨져 있든 꽤나 쉽게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범죄자의 인권이나 이후의 평범한 삶 같은 건 없었다. 이렇다 보니 재판 후의 죄수는 감옥에 가둬둘 필요가 없었다. 죄수를 먹여 살리는 수고를 기울일 이유가 없었달까. 아마 그런 개념을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가를 치르게 할 다른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3. 귀족을 가두던 감옥으로서의 성 하지만 역사서에선 감옥에 갇혀서 살았던 인물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떠올려야 할 것은, 중세의 역사는 귀족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고, 고귀한 귀족은 법적으로 비귀족과 다른 법의 적용을 받았다는 것이다. 간혹 귀족이라 법의 적용을 안 받고 피해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아니다. 귀족에게 적용되는 법이 평민과는 명시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귀족'의 학문적 정의는 '법적 특권을 보장 받는 계층'이다. 결론만 보면 귀족의 신체를 훼손하거나 죽이는 일은 드물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죄를 지었거나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어야 할 때는 평생을 가두기도 했다. 그때 사용된 게 성이다.
15세기의 영국 왕비, 조안이 연금 생활을 했던 리즈 성(Leeds castle).
성 안에서 귀족이 어떤 대우를 받느냐는 상황마다 다르다. 신분 지위에 따라서도 다르고, 시대나 장소의 상황에 따라서도 달랐을 것이다. 어떤 귀족은 성 안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했을 것이다. 예컨대 15세기 초 영국의 왕비였던 나바르의 조안(Joan of Navarre)은 의붓아들 헨리 5세에게 재산을 빼앗기고 여러 성들을 전전하는 수감생활을 했다. 중세 시대에 수감생활 기록 같은 것이 자세히 기록되진 않았지만, 그녀는 성 안에서 상대적으로 꽤 자유롭게 돌아다녔을 확률이 높다. 왕족이나 귀족이 성 전체 범위에 연금되어 나름의 일상 생활을 보낸 정황은 종종 관찰된다. 하지만 한 개의 방에 갇혀 있는 경우도 흔했다. 아마도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귀족이나 기사는, 혼자서는 탈출하기 어려운 무거운 문과 잠금장치가 있는 방에 갇혔을 것이다. 세상과 격리되어서 소식을 알 수 없게 감금 당한 귀족들도 처지가 비슷했을 확률이 높다. 리처드 2세처럼 말이다. 어느 쪽이든 왕족이나 귀족들은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제법 살만한 화려한 방이나 성에서 감금 생활을 한 경우가 많았다. 근대적인 교도소 개념이 태동하기 전까지는, 혹은 그 이후에도, 감옥의 개인실은 귀족과 정치범들을 어느 정도 편안하게 수감하기 위한 시설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17세기 바스티유 감옥에 갇혀 지냈다던 정체불명의 죄수 '철가면'을 묘사한 그림. 중세의 귀족이 감금되었던 일반적인 방은 이보다도 좋았을 것이다.
성의 이런 모습은 이야기로도 남아 있다. '라푼젤'이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성의 탑에 감금된 형태부터, '철가면' 같은 본격적인 감옥 생활까지 말이다. 영국 영어에서는 아예 'send to the tower'가 감옥(영국의 오래된 성인 런던 타워)에 보낸다는 관용구로 사용되었을 정도다. 이제 다음에는 중세 시대 성과 던전 이야기를 하겠다. 그 다음에는 현대로 이어지는 감옥의 변화를 이야기하겠다. 분량이 약간 애매한데, 감옥 이야기를 다시 할 일은 없을 것 같아서 3편으로 나눠 쓸 예정이다.
▶[중세의 감옥 (2) : 성(Castle)과 지하감옥과 던전(Dungeon)]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