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의 성씨(姓氏) (1) : 성(姓)과 씨(氏)
2024년 11월 12일 · 오전 12시 00분
0. 들어가며... '4대 문명'이란 표현이 있다. 그 중 인류 최초의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이고, 인류 최초로 성씨를 발명한 곳은 황하 문명이다. 중국은 약 4000년 이상 전에 성(姓)을 발명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작년에 유럽인의 성씨와 이름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약 1년 만에 '동양인의 성씨와 이름'를 쓰게 됐다. 필자가 판타지와 무협을 좋아하기에, 동양편도 한번 다루고 싶었다. 우리가 동아시아인이기도 하고 말이다. 원래는 짧게 다루려고 했지만 올해 제대로 된 연재를 쓴 적이 없어서 좀 더 공을 들였다. [유럽의 이름과 성씨] 연재에서 살펴 보았듯이, 이름과 성씨의 가장 큰 역할은 개인의 식별이다. 이름으로 먼저 구별하고, 성씨로 한 번 더 구별하여 동명 중복을 크게 줄인다. 중국식 이름은 초기엔 한 글자 이름을 쓰다가 나중에 두 글자로 바뀌는데, 이 또한 중복을 줄이고 기능을 추가한 것이니 성씨가 만들어진 이유와 유사하다. 동양과 유럽의 성명 시스템을 비교하면 비슷한 면과 반대인 면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것이 재미있는 것 같다. 유럽편은 이름을 먼저 다루었지만, 중국편은 성씨부터 시작하겠다. 먼저 무협 소설의 배경이 되는 중국의 성씨와 이름을 먼저 알아보고, 이후 한국과 일본의 순서로 동아시아편을 다뤄보려고 한다. 3국을 따로 설명하다 보니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다. 한국인의 성명 시스템은 중국의 시스템을 거의 그대로 도입하여 매우 유사하니, 중국편의 내용을 눈 여겨 보시면 좋겠다.
1. 성(姓)과 씨(氏)의 기원 오늘날 이름에 붙는 '성(姓)' 혹은 '씨(氏)' 혹은 '성씨(姓氏)'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다.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 성(姓)과 씨(氏)는 본래 달랐다. 간단하게 보면, 성(姓)은 혈통을 나타내고, 씨(氏)는 사회 계급을 나타내는 것이 기원이다. 성이 먼저 있었고, 씨는 그보다 상당히 나중에 등장했다. '식별'이라고 하는 가장 중요한 기능에서 보면, 성(姓)이 본래 우두머리 일족의 혈통을 구분했고, 씨(氏)는 우두머리의 혈족이 커지면서 내부의 세부 계급을 다시 나눠야 했기 때문에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둘은 처음엔 명확히 다른 기원을 갖고서 구별됐지만, 대략 춘추전국시대(BC771-BC221) 동안 합쳐지다가, 한나라(BC202-AD220) 때 완전히 하나가 됐다. 참고로 삼국지 시대가 한나라 말이니, 합쳐진 건 그 직전의 이야기다. (1-1) 성(姓) '성(姓)'이란 글자를 말할 때 동양에서는 '여자(女)'와 '낳다(生)'의 합성어란 점에서 고대 모계 사회의 흔적이라는 설을 주장한다. 그 근거로 '강(姜)'이나 '요(姚)' 등 상고시대의 8대 성(姓)에 모두 '여자(女)' 부수가 들어 있단 점을 든다. 상고 시대의 민족 설화에 시조(혹은 그 어머니)로 여성이 자주 등장하는 것 또한 어머니만을 알 수 있었던 고대 모계 사회의 흔적이라고 말한다. 일부 서양 학자들은 증거가 부족하다며 성(姓)에 포함된 '여자(女)' 부수는, 족외혼(族外婚) 풍습에서 다른 씨족에게 시집을 간 여성의 성(姓)에서 기원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과 동양의 여러 자료에서는 보통 모계 사회설을 지지한다.
'성(姓)'자는 여자(女)와 낳다(生)가 합쳐진 글자다.
중국에선 성(姓)의 기원으로 전설 속 삼황오제를 말한다. 예컨대 '강(姜)'은 염제 신농씨(神農氏)의 성이라 하여, 강수(姜水) 인근에서 태어나 자란 것을 기원으로 한다 말해진다. '요(姚)'는 요순 시대 순(舜)임금의 성(姓)이라고 하는데, 요허(姚墟)에서 태어난 것을 기원으로 한다. 참고로 순 임금의 씨(氏)는 '우(虞)'다. 이 기원에 '어머니'가 등장하지 않는 건 아마도 부계 사회로의 변모 때문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강(姜)'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씨로 이야기되는데, 신농(神農)으로부터 주(周, BC1046-BC771)나라의 개국공신 태공망 강상(姜尙)으로 이어진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강(姜)씨 등도 강태공을 시조라고 말한다.
아마도 상고시대 중국 인물 중 가장 유명할 강태공. '엎질러진 물'이란 동양의 속담도 강태공의 일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세 유럽의 성씨가 동명이인의 구분이란 필요성이 강했다면, 중국의 성(姓)은 우두머리의 증명과 혈통, 그리고 집단의 구분을 위해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대개 처음에는 (우두머리의) 어머니가 살았던 지역명이 성(姓)으로 변했다고 하며, 그 소속 집단의 이름이 '성(姓)'의 기원이기도 했던 걸로 보인다. 이런 구분을 이용하여, 늦어도 서주(西周, BC1046-BC771) 시대에는 이미 같은 성(同姓)끼리의 결혼을 막는 풍습이 있었다. 동성불혼(同姓不婚)에는 몇 가지 이유가 보이는데, 기원전 5세기 경의 《국어(國語)》에는 근친혼에서의 출산에 대한 두려움이 기록되어 기형과 유전병의 문제를 인지한 것 같다. 동시대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는 같은 성을 가진 여자와 결혼하면 버릇이 없다면서, 남존여비사상이 이미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춘추좌씨전》은 공자의 《춘추》를 좌구명이 풀어서 해석한 책이다. 또한 유럽의 귀천상혼 금지처럼 고대 중국도 동계급끼리만 결혼할 수 있었는데, 천자(天子)만이 예외로 제후 가문과 통혼이 가능했다. 아마도 계급 사회와 봉건 사회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이처럼 성(姓)은 족장과 집단의 구분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씨(氏)보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초기의 성(姓)은 귀족만이 갖고 있었고, 그대로 고대 국가들의 이름이 되기도 했다. (1-2) 씨(氏) 중국의 고대 국가들은 봉건제 성향을 가졌는데, 상(商, BC1600-BC1046)과 주(周, BC1046-BC771) 때에는 확실히 관료를 임명하고 신하와 분가(分家)들에게 땅을 나눠주었다. 이때의 관직명이나 작위, 혹은 영지의 이름 등이 씨(氏)로 변화한다. 기존의 지배층 안에서 적장자를 구분하고 계급에 따른 우열이 다시 나뉘며 벌어진 일이다. 이에 따라 씨(氏)는 남성의 지위와 신분이 되었고, 각 성(姓)의 지파(支派)로써 파생됐다. 《춘추좌씨전》에는 "천자가 출생에 연유하여 성(姓)을 하사(下賜)했고(天子建德、因生以賜姓), 땅을 분봉하며 씨(氏)를 지어줬다(胙之土而命之氏)"는 내용이 실려있다.
'씨(氏)'자는 식물의 뿌리가 주변으로 뻗으며 갈라져 나가는 것을 묘사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천자(天子)가 성씨(姓氏)를 하사하는데, 출생지에 연유하여 성(姓)을 주었고, 봉지(封地)에 따라서는 씨(氏)를 나눠줬다. 그리고 제후는 자신의 분가(分家) 등에게 성(姓)을 하사할 권한이 없었기에 왕부(王父)의 자(字)를 씨(氏)로 만들었고, 관리나 고을의 통치자는 공을 세우면 관직명이나 고을명을 씨(氏)로 삼았다. 정(鄭), 진(陳), 송(宋), 주(朱), 조(趙) 등은 나라 이름에서, 유(劉), 양(楊), 모(毛), 상관(上官) 등은 도읍/영지 등의 이름을 딴 성씨다. 이처럼 계급을 따라 내려가며 출생/신분/관직/지역 등으로 씨(氏)가 나뉘기에, 씨(氏)가 곧 일족의 계급과 위치를 보여주는 것이 되었다. 또한 성(姓)은 그 기원에서 여성도 가질 수 있었던 것에 비해, 씨(氏)는 권력을 잡고 통치를 한 남성만이 사용했다. 전국시대 전까지는 여성은 성(姓)을 붙여서 부르고, 남성은 씨(氏)를 붙여서 불렀다고 한다. 이렇게 중국의 성씨는 혈통과 봉건제에서 기원하였다. (1-3) 종법제도와 종가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주나라는 종법(宗法)이란 제도를 갖고 있었다. 간단히 보면 지배층을 씨족과 혈통으로 묶고서 계승해 나가는 제도이다. 장자를 대종(大宗)이라 부르고 동생들을 소종(小宗)이라 부르는데, 장자가 계급과 봉토를 계속 승계하고 동생은 형의 신하가 되는 주나라 봉건제의 기틀이다. '봉토를 나눠 준 분파에서 씨(氏)가 생겨났다'는 것도 이 제도에 기반을 둔다. 같은 성을 가진 형제 가문이 신하가 되면 새로운 씨가 생기는 것이다. 종묘(宗廟)나 종가(宗家) 같은 개념이 이 시대에 시작됐고, 훗날 한반도와 일본으로도 퍼졌다. 어쩌면 중국어로 '원조'나 '정통성'을 뜻하는 정종(正宗)도 여기서 나온 걸 수 있다. 무협에서 '정종 무학'이라고 할 때의 그 '정종'이다. 동양식 가부장 제도 역시 여기서 출발했을지 모르고, 적어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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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과 성씨
흠... 2024-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