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의 성씨(姓氏) (3) : 성씨와 이민족과 무협
2024년 11월 19일 · 오전 12시 00분
5. 이민족과 복성(複姓) 복성(複姓)은 시간이 지나며 '이민족의 성씨'란 이미지로 변하는데, 삼국지 시대가 끝난 위진남북조(220-589) 시대부터 시작된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란, 삼국지의 승자인 위(魏, 220-265)나라와 그를 집어삼킨 사마씨가 세운 진(晉)나라의 위진 시대, 그리고 이후 이민족이 난립하는 남북조 시대를 함께 부르는 말이다.
사마의(司馬懿, 179-251). 삼국지 최후의 승자.
사마의 일족의 서진(西晉, 265-316)에선 얼마 지나지 않아 '팔왕(八王)의 난'이란 내란이 일어나는데, 이 때까지 중원에 유입되었던 흉노나 선비족 같은 이민족들이 편승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중원 북부에 이민족의 나라들을 세운다. 이때의 다섯 오랑캐(=오호五胡)가 세운 13개 국가와 한족의 3개 국가가 '5호 16국'이다. 그 후 이민족들의 영토가 된 북부에선 선비족 일파가 북위(北魏, 386-534)를 세워 화북을 통일하며 북조(北朝)의 시작을 알리고, 강남의 송(宋, 420-479)나라에서 이어지는 왕조들을 남조(南朝)라고 부르게 되니 이것이 남북조 시대다.
이미지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ap_of_Northern_Wei_and_Liu_Song_Dynasty_ja.png 宋・北魏, by 俊武, CC BY-SA 3.0 남북조시대. 이민족의 북쪽(北魏)과 한족의 남쪽(宋).
이 시기부터 이민족의 씨족 이름이 대거 중국 성씨로 편입된다. 이민족의 성씨에는 두 글자 이상이란 특징이 있었고, 이후의 중국 역사에선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복성(複姓)의 대부분이 이민족 기원 성씨가 된다. 특히 세 글자 이상의 성씨는 거의 확실히 이민족이나 소수 민족 기원이라고 한다. 이민족 파트를 굳이 따로 뺀 이유는 무협 때문이므로, 이제 무협을 중심으로 보자.
6. 무협의 이민족 성씨 무협에는 생각보다 이민족 기원 성씨가 많이 나오며, 이민족의 성씨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작가들은 주로 악역의 성씨로 사용한다. 대표적으로 보면 모용, 위지, 혁련, 우문, 야율, 독고, 호연(呼延) 등이 있다. 모용(慕容)씨는 한국 무협에서 '모용세가'란 이름으로 단골로 등장한다. '모용'은 오호십육국 때 모용황(慕容皝)이 세운 연나라(前燕, 337-370)의 성씨다. 이들은 이민족인 선비족의 일파로, 선비족은 투르크계 혈통으로 인해서 종종 금발 등의 외모가 발현된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선 모용씨가 모씨와 용씨로 나뉘어서 사라졌단 소문이 도는데 현존한다. 단지 주원장 때 화를 피해서 모씨와 용씨로 성을 바꾼 일족들이 있는 건 맞다. 위지(尉遲)씨는 보통 울지(尉遲)씨라고 부르는데, 한국 무협에서 위지천(!) 등의 인물로 대표된다. 모용과 마찬가지로 선비족의 지파이며,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신장(新疆)에 있는 호탄(于阗) 왕국에서 잘 나갔다고 하는데 찾아보면 왕족이다. 구무협에선 정말 자주 등장했는데 요즘은 잘 안 나오는 편이다.
이미지 출처 : 카카오 페이지, https://page.kakao.com/ * 문제가 될 경우 삭제합니다.
혁련(赫連)씨는 흉노족 기원의 성씨로 무협에서 조연으로 자주 등장한다. 흉노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사이에 시베리아부터 몽골 등 북부 지역에 살았던 유목민족의 연합체이다. 흉노는 최초로 유목민 제국을 세운 민족이며, 중국이 만리장성을 세운 이유 중 하나가 흉노족 때문이었다. 지도자의 칭호가 용랑전으로 유명해진 선우(單于)다. 오호십육국 때는 혁련발발(赫連勃勃)이 하(夏, 407-431) 나라를 세우기도 했는데, 이후 하나라의 멸망과 함께 흉노족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우문(宇文)씨는 원래 남흉노 선우의 먼 친척이었는데, 흉노가 멸망하면서 독립한 선비족의 일파로 중국 역사에 등장한다. 남북조 시대에는 우문각(宇文覺)이 북주(北周, 557-581)를 세운다.
이미지 출처 : https://zh.wikipedia.org/wiki/%E5%8C%88%E5%A5%B4 公元前250年的匈奴领域示意图, by Gabagool, CC BY 3.0 기원전 250년경 흉노족의 영토.
야율(耶律)씨는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거란족 기원의 성씨다. 907년 당나라가 멸망한 후, 917년엔 야율 아보기(耶律 阿保機)가 화북 지역에 요(遼, 916-1125)나라를 세우기도 했다. 참고로 요나라는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켰다. 이후 요나라는 여진족의 금나라에 멸망하고, 금나라는 몽골에게 멸망하는 순으로 이민족 국가가 바뀌어 간다. 사실 어지간히 치밀하게 설정하지 않는 한, 작가가 뭐라 생각하든 거의 대부분의 무협 소설은 명나라(1368-1644)에서 청나라(1636-1912)의 사이에 걸쳐 있다. 무협에 깔려 있는 여러 설정들... 그러니까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여러 역사적/종교적 사실들, 예를 들어 제갈공명이나 소림사라거나, 무기나 갑옷의 종류, 식재료나 음식, 법과 풍습 같은 것들이 전부 다 충족되려면 최소한 명나라쯤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naver.com 금의위나 동창 같은 기관은 대표적인 명나라 황실의 조직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협에 등장하는 이민족 기원의 성씨 가문은 이미 위의 과정을 모두 겪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이민족들은 역사와 함께 결국 한족의 일원으로 편입되었고, 그들의 성씨는 많은 경우 한족의 성으로 바뀌기도 했다. 예컨대 모용(慕容)씨는 일부 집단이 모(慕)씨와 용(容)씨로 분리되었고, 위지(尉遲)씨 역시 일부가 위(尉)씨와 지(遲)씨로 나뉘었다. 단지 이런 현상은 이민족 기원 복성에서만 일어난 건 아니어서, 시대에 따라 성씨가 바뀌는 패턴이나 풍조 같은 유행 비슷한 게 있는 듯하다. 하나 더. 무협지에서 이민족 기원 성씨 인물들은 악역으로(특히 야율, 혁련, 위지) 자주 등장하지만, 사실 중국의 역사적 인물을 보면 이민족 성씨의 인물들이 한족 국가에서 고위직 관리를 하기도 하고 적당히 교류를 하면서 산 것 같다. 학자들은 이민족과 전쟁을 할 때도 민간 차원에서의 한족과 이민족 사이의 무역은 활발했을 거라고도 말한다. 실제로 이민족 기원의 복성은 침략 때만이 아니라, 당나라 때처럼 교류가 활발했을 때 역시 크게 성했다.
7. 복성의 쇠퇴 중국의 복성(複姓)은 이후 점차 숫자가 줄어든다. 옛 기록에서 최소 1500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200개 정도라고 한다. 이유는 단성을 가진 집단이 컸던 것에 비해, 복성 집단 자체가 원래 작았기 때문이라 말한다. 시간이 흐르면 큰 집단이 더욱 커지기에 유리하고, 멸문지화를 겪어도 생존하기 유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실생활에서는 한 글자가 더 편하다는 점 등을 든다. 세월과 함께 성씨가 한 글자 형태로 많이 변하기도 했다. 복성의 경우 대표적으로 두 글자 성이 각각 나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사마(司馬)씨의 경우, 후손들이 사(司)씨와 마(馬)를 칭하며 갈라지기도 했는데, 이유는 낭만적이었던 삼국지의 승자인 위나라를 배신한 죄인이란 점에서 후손들이 숨고 흩어졌다는 평가가 있다. 사마천(司馬遷) 같이 굴욕적인 형벌을 받는 경우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 같다. 앞서 본 것 같은 모용씨나 위지씨처럼 이민족 기원의 성씨도 모씨와 용씨, 위씨와 지씨로 나뉘기도 한다. 큰 사건이 있기도 하고, 한족에 동화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다양한 이유로 한 글자 성으로 바뀌는 과정을 겪는다. (그리고 때로는 두 글자로 복원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중국인의 성씨는 대부분이 한 글자인 단성이 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8. 마치며... 다른 모든 것들도 그렇지만, 인간의 이름에 대해 쓰면서도 역사를 함께 볼 수 밖에 없구나 싶다. 성명(姓名)이란 게 기능만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간 시대의 흐름과도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의 성씨가 '구분'에서 시작되어 가문과 지위의 의미가 강화됐다면, 중국의 성씨는 왕과 지배자의 혈통에서 시작해서 구분으로 넘어갔다는 느낌도 든다. 전부 자세히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복성이 만들어진 이유 중엔 이주한 가문과 같은 성씨를 가진 가문이 존재할 때 구분을 위해서 글자를 하나 더 붙였다거나 하는 것도 존재한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 외에도, 중국인의 성씨는 조상의 이름이나 시호, 자(字), 산과 강, 방위, 출생 당시의 특징, 항렬, 동식물 등의 이름에서 기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많은 경우가 지역과 지명에 관련된 기원이다. 그리고 기원에 관련된 부분은 이름편에 나올 '본명을 사용하는 것을 꺼리는 문화'와도 연관되어서, 아주 초기의 고대와 그 후는 조상의 이름이나 일월강산의 명칭을 대하는 방식이 다르단 느낌이 있는데, 아마 거기까지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을 것 같다. 못 다룬 이야기가 참 많지만 넘어가겠다. 다음 편인 '중국인의 이름' 역시 3부쯤 갈 것 같은데, 잠깐 숨을 돌리고 12월 첫 주 쯤에 올리도록 하겠다. 그런데 한중일 3국을 다 하면 생각보다 너무 길어질 것 같기도 한데 음-_-;;
부록 : 중국인의 족보 성씨가 일찍부터 있었던 만큼 중국의 족보는 고대부터 시작됐는데, 한중일 공통으로 초기 족보는 왕실에서 시작됐다. 이유는 왕족의 결혼이나 관리의 등용 같은 문제가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주(周)나라 때 이미 왕족의 계보 등이 작성된 걸로 보인다. 한나라(BC202-AD220) 때에 와서는 왕실 밖에서도 족보를 만들어 가계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특히 후한 말부터 문벌사회가 성립되고,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의 부작용으로 관직을 특정 가문들이 독점하면서, 벼슬과 혼인을 위해 인물과 가격을 결정하는 보첩(譜牒, 계보를 기록한 문서)류가 쏟아져나왔다. 당나라(618-917) 때부턴 민간의 족보 편찬이 성행했으나 당나라 말부터 오대십국시대(907-979)의 전쟁으로 귀족의 족보는 거의 소실됐다. 하지만 편찬은 계속 되어 14세기 명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족보 편찬은 정점에 달한다. 그러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 60~70년대의 문화대혁명 때 족보와 가족 사당들을 파괴하는 정책적인 운동이 펼쳐지면서, 이후 수많은 족보가 소실되고 많은 사람들이 가계도를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베이징 올림픽 즈음부터는 유교를 통치에 다시 이용하기 위해, 현재는 족보 부활 운동이 벌어진 상태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조조나 제갈량 등의 후손을 찾기 위한 최근의 정책과 연구들이 이런 배경에서 추진되는 게 아닐까도 싶다.
▶[중국인의 이름(1) : 동양의 이름과 주술적 신앙]로 이어집니다.◀
▶[부록] 제갈량의 후예◀
이름과 성씨
흠... 2024-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