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제갈량의 후예
2024년 11월 27일 · 오후 8시 30분
중국 성씨편의 부록격인 '제갈'씨에 대한 이야기. 사실 본편에 들어갈 내용이었는데, 이걸 넣으면 연재를 한번 더 해야할 것 같아서 따로 뺐습니다. 분량도 대폭 늘렸습니다(?). 1. 한국 무협과 제갈량 제갈량(諸葛亮). 삼국지의 인물 중 아마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인기인이다. 삼국지 연의에서는 하늘이 내린 천재적인 군사(軍師)로써 활약했고, 실제 역사에서도 뛰어난 재상이자 행정가, 발명가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제갈량의 후예가 무협에 등장하는 것은 '한국 무협'의 경향이다. 느낌적으론 10편 중 9편 넘게에서 아마도 제갈량의 후예일 가문, 즉 '제갈(諸葛)세가'가 등장한다. 솔직히 안 나오는 경우가 손에 꼽는다.
제갈량(諸葛亮, 181-234). 촉한의 승상이자 후작. 무향후(武鄕侯). 자(字)는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忠武). 와룡 선생이라 불렸다.
한국 무협에서(이하 '무협') 제갈가(諸葛家)는 삼국지 연의의 설정을 이어받는다. 제갈가의 후예는 하나 같이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로써, 신기묘산(神機妙算)과 기문둔갑(奇門遁甲), 그리고 기관진식(機關陣式)의 재주를 갖고 있다. 절반 이상의 확률로 등장하는 '무림맹(武林盟)'의 군사(軍師) 역할로 나오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그리고 두뇌에 대한 반작용으로 무공이나 건강이 약하거나, 가문의 무공 자체가 뒤떨어진다거나 하는 일반적인 특징을 갖는다. 양산형 한국 무협 소설의 기본 설정(...). 참고로 무협에서 제갈가는 등장하지만 삼국지 역사 얘긴 보통 안 나온다. 실제 역사를 언급하면 설정이 복잡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다들 알고는 있지만 '제갈량'이란 인물 자체가 언급되지 않는다. '제갈 가문의 천재들'이란 설정만을 공유할 뿐... 아무튼 이번 글은 무협이 아니라 실제 역사의 제갈량의 후예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면, 제갈량의 후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2. 제갈량의 선조 제갈(諸葛)씨는 기원부터가 정확하지 않다. 추적할 수 있는 기록이 별로 없다. 제갈량은 서기 181년생으로 2세기의 인물이다. 거의 1800년 전인데다가, 한나라는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중국식 성씨 시스템이 막 자리를 잡았을 무렵이다. 제갈이란 성씨의 기원 중 유력한 설이, 아마도 제갈(諸葛)씨는 '갈(葛)'씨에서 파생된 성씨란 것이다. 아마도 나라가 망해서 이주한 지역에 이미 '갈(葛)'씨가 있었기에 출신지의 이름인 '제(諸)'를 추가해서 구분했단 설. 몇 가지가 있는데 확실한 건 없다.
제갈량을 모신 무후사(武侯祠).
기록상 제갈량의 선조가 확실한 인물이 한 명 알려져 있다. 전한(前漢, BC202-AD8) 시대의 관리였던 제갈풍(諸葛豊, 생몰 미상)인데, 《한서(漢書)》에 출신이 낭야(琅琊) 사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기에 제갈량의 성씨를 낭야제갈씨(琅邪诸葛氏)라고 부른다. 하지만 선대의 계보를 모르기에, 제갈량 측의 시조는 제갈량의 아버지 제갈규(諸葛珪)로 하고 있다. 3. 제갈량의 후손 제갈량은 후손을 잘 보지 못했고 그나마도 요절하였으나 한 명만은 살아남아 가계를 이어간다. 제갈량은 황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오랫동안 아들을 얻지 못했는데, 형의 둘째 아들 제갈교(諸葛喬)를 양자로 들였지만 그의 자손이 아닐 뿐더러 25세에 요절한다. 그 후 47세란 늦은 나이에 아들 제갈첨(諸葛瞻, 227-263)이 태어나는데, 234년 제갈량이 54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 고작 8살이었다. 제갈첨은 어릴 적부터 똑똑했기에 제갈량을 좋아하던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으며, 아버지의 작위인 무향후(武鄕侯)를 이어받고 유선의 딸과 결혼한다.
이미지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Zhuge_Liang Temple of Huang Yueying, by Morio, CC BY-SA 4.0 제갈량의 부인을 모신 월영전(月英殿). 월영(月英)이란 이름은 후대에 붙여진 것이다.
제갈첨은 제갈상(諸葛商, 245-263)과 제갈경(諸葛京) 두 아들을 보았는데, 263년 위나라의 촉 정벌 때 제갈첨과 제갈상 부자는 목숨을 잃는다. 다행히 제갈경은 화를 피했으니, 이후의 제갈량의 후손은 모두 제갈경의 자손이다. 제갈경은 위나라 멸망 후 사마씨의 진나라에서 관직까지 한다. 참고로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은 맏아들 제갈각과 오나라에서 살았는데, 제갈각은 훗날 정쟁에서 원한을 사서 일족이 멸족 당한다. 이에 양자로 보냈던 제갈교의 아들 제갈반(諸葛攀)이 대를 잇기 위해 오나라로 돌아갔으나 요절한다. 하지만 제갈반의 아들 제갈현(諸葛顕)은 촉에 남았다가, 제갈경이 피난을 갈 때 함께 하동(河東)으로 갔다고 한다. 이후의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으나,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을 피해 동진에서 살아남은 기록은 존재하는 것 같다. 제갈량의 동생인 제갈균의 행적은 기록이 남지 않아 묘연하다.
4. 삼국지 이후의 제갈량의 후예 제갈량의 후예는 이후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갔기에 행보를 알 수 없게 됐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제갈씨가 당연히 모두가 제갈량의 후예인 것이 아니다. 삼국시대 당시만 해도 제갈씨를 가진 다른 인물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제갈량이 당대의 유일한 제갈씨였던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국 전역에 걸쳐서 제갈씨는 퍼져있었을 테고, 어떤 경우는 아예 다른 뿌리에서 같은 성씨가 된 가문도 있었을지 모른다. 이제 와서는 제갈량의 후예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크게 두 가지 단서가 있는 걸로 보인다. (4-1) 제갈량 연구회 먼저 첫 번째는, 1983년부터 시작된 '제갈량연구회(诸葛亮研究会)'라는 곳의 7차 전국심포지엄(1993) 발표 자료다. 이 심포지엄에서는 중국 전역에 제갈량의 후예가 약 1만 6천 명이 있다고 말한 것 같다. (참고로 현재 제갈량의 후손이 16000명이란 건 영문 위키에서도 언급된다. 출처는 불명.)
검색해 보면 제갈량연구회의 7차 연구가 출판되어 있는듯한데 필자가 중국어를 못해서 아쉽다(...).
단지 필자가 중국어를 못하기 때문에, 저 단체를 검증하지도 못하고 (필자는 정식 역사학회가 아닌 재야 학자들의 연구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저 연구 결과가 중국 내에서 인정되더라도 타국의 학계에서 어떻게 평가되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이 글에선 그냥 저런 자료가 있다 정도의 이야기. 학계에서 정식으로 인정되는 건지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면 좋겠다. (4-2) 제갈 팔괘촌 좀 더 유명한 쪽으로는 비교적 최근에 유명해진 '제갈량의 후예들의 마을'이 있다. '팔괘촌/제갈 팔괘촌(诸葛八卦村)'으로 불리는 제갈씨의 집성촌이다. 절강(浙江)성 난계(兰溪)시에 위치하는데, 무협 독자들에겐 항주(杭州, 항저우)의 서쪽이란 표현이 더 익숙할 것 같다. 남서쪽으로 200km쯤 가야 하지만 말이다.
※ 현대의 중국 지명은 중국어 발음으로 표기하는 게 원칙이라 원래는 '저장성 란시시'라고 표기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협에선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기 때문에 한국식 음독으로 표기했습니다. 이들은 제갈량의 손자인 제갈경의 핏줄을 이었다고 말하고, 족보도 가지고 있다. 주민 약 3천 명 중 2천이 넘는 대다수가 제갈(诸葛)씨이며, 마을은 구궁팔괘(九宫八卦) 이론을 사용하여 설계됐다. 역사 또한 오래 돼어 원나라 때(한반도의 고려 때다) 건립되었으며, 마을엔 승상사(丞相祠, 씨족의 제사를 드리는 사당)로 대표되는 명청 때의 건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최소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마을이며, 국가문화유산과 국가 지정 4A급 관광지(5A가 최고 등급)로 등록되어 있다.
이미지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Zhuge_Village 팔괘촌, by PromoteMyCity, CC BY-SA 4.0
하지만 이들이 제갈량의 후예라는 것은 족보 이외에는 증명을 할 수가 없으며, 학자들은 족보의 진위 여부를 의심한다.
참고로 전 세계 어느 민족의 어느 족보든, 족보라는 물건은 별로 신뢰도가 높은 자료로 인정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족보라는 건 보통 후대의 창작과 수정이 가미되어 있기 때문이다. 족보는 원래 왕가가 통치를 하기 위해서, 나아가 귀족들의 가문들이 공고해졌을 때 핏줄의 우월성을 구분하고 보여주기 위해 만든 건데, 유럽편 연재에서도 언급했듯 신의 자손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후대에는 기독교 계열로 조상을 고치기도 한다. 핏줄의 기원부터 시작해서 가문의 위상을 위해서, 때로는 상속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위해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창작하고 수정하고 활용해 온 게 역사 속의 족보다. 후손의 혈통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특정 조상(예컨대 제갈량)의 '진짜' 묘를 찾아서, 잘 보존된 (훼손이나 뒤바뀜 등도 없어야 한다) 시신에서 DNA를 무사히 채취한 후, 후손들의 유전자와 비교해야 한다. 당연히 고대 인물들에겐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혈통을 증명한다고 하더라도, 중간에 기록된 모든 과정이 다 신뢰도가 높다고 말할 수도 없다. 어디까지나 참고 자료 수준. 너무 민감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한국의 특정한 족보의 신뢰성을 검증하는 일은 없겠지만, 어찌 됐든 족보가 신뢰도가 높은 자료가 아니란 건 말해둔다. 같은 이유에서 한국의 특정 가문의 혈통이나 족보 이야기는 웬만하면 하지 않을 생각이다. 지금 이건 중국 이야기니까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중국 정부에선 밀어주고 있는 관광지이며, 실제 역사도 굉장히 오래 되었고 보존도 잘 돼 있는 것 같다. 팔괘촌에 전해지길, 제갈량은 후손에게 흥미로운 유언을 남겼다는데, "좋은 재상이 될 수 없다면 좋은 의사가 돼라"는 유언이다. 이 마을의 후손들은 대대로 유언을 지켰고, 의술과 약재로 지역에서 명성을 얻으며 부유했던 것 같다. 지금의 팔괘촌에도 의사가 많이 있다고 한다. 5. 마치며... 제갈량의 후손이 역사 속에서 계속 존재를 드러냈다면 참 낭만적이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다. 사실 고대 난세의 패전국 최고 사령관의 자손이 한두 명이라도 살아남고, 나아가 승전국에서 벼슬까지 했단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참고로 제갈량에 관해서는 후대에 계속해서 창작된 여러 이야기가 있어서, 어떤 이야기나 서적에선 후손이 누가 있었다고 전하지만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허구로 본다. 사실 한국 무협의 제갈세가는 연의의 신화적인 모습을 모티프로 딴 거라서, 후손들의 행적이 실존했다면 무협과는 정말 많이 달랐을 것 같다. 단지 미화가 있었을진 모르나, 기록상 제갈량의 혈통은 여러모로 범인보다 뛰어난 편이었던 것 같다.
이미지 출처: (좌) 예스24 : yes24.com * 문제가 될 경우 삭제합니다. * 이미지가 수정됐습니다. 이전 이미지는 확인 결과 필자의 윤리 기준에 맞지 않았습니다.
제갈량은 당대엔 맞서 싸운 적들에게도 존경을 얻었고, 1800년을 넘어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이 알 정도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사랑받고 있다. 삼국지 연의를 넘어, 한국이란 타국에서 창작되는 수많은 무협 소설 속에서도 '제갈세가'가 등장하는 건 그런 애정의 표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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