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인식의 날, 자(字)를 받다
동양에선 이름을 중시해서 조심스럽게 다뤘고, 본명을 부르는 것 자체가 예의에 어긋나는 문화로 발전했다. 특히 다 큰 성인인데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매우 무례한 행위였다.
사람을 이름으로 부를 수 없었다면 어떻게 불렀을까? 어른이 되어 사회에서 사용하는 호칭이 바로 '자(字)'였다. 유비의 자(字)는 '현덕', 제갈량의 자(字)는 '공명'이니 이름보다 훨씬 자주 사용되었을 것이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패왕(霸王) 항우.
사실 '항우(項羽)'의 본명은 '항적(項籍)'으로,
'우(羽)'는 자(字)에 해당한다.
《예기(礼記)》에 따르면, 고대 중국에선 남자는 20세, 여자는 15세 때 성인식을 치렀다. 남자는 상투를 틀고 관(冠)을 쓰기에 관례(冠禮)라고 불렀고, 여자는 머리에 쪽을 찌고 비녀(笄)를 꽂았기에 계례(笄禮)라고 불렀다.
이때 자(字)를 받았는데, 이는 성인이 되었으니 앞으론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피휘의 금기가 여기에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자(字)가 담은 본래의 의미는 금기보단 예절에 관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字)의 기원 자체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진 않다.
성인식 이후론 이름 대신 자(字)를 주로 사용했다. 단지 자(字)는 '존중과 예의를 표현하는 이름'이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칭할 때는 쓰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말해야 하는 경우엔 본명을 써서 겸손을 표했다고 한다.
자(字)가 불리는 경우는 대부분 남이 자신을 부를 때였으며,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는 부모나 스승, 혹은 군주와 같은 윗사람에 한정되어 사회적으로 허용됐다.
바깥에서 주로 사용됐기에 중국에선 '표자(表字)'라고도 부르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두 번째 이름이란 의미에서 '부명(副名)'이라고도 설명한다.
2. 자(字)와 이름(名)
부모는 자식에게 자(字)를 어떻게 지어줬을까?
'자(字)'는 덕(德)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지었으니, 북제의 안지추(顏之推, 531-?)는 "사람의 이름(名)은 서로를 구별하는 데 쓰이고, 자(字)는 그 사람의 덕행을 나타내는 데 쓰인다"고 말했다.
조운(趙雲) 자룡(子龍).
《주역》에서 "구름은 용을 따르고(云从龙), 바람은 호랑이를 따른다(风从虎)"고 하니,
구름(雲)과 용(龍)은 고전에 기반한 연관성을 갖는다.
자(字)와 본명(名)은 서로의 글자가 밀접한 연관을 갖도록 지어졌다.
예컨대 관우(關羽)의 자는 운장(雲長)인데, '날개(羽)'와 '구름(雲)'이란 연결점이 있다. 제갈량(諸葛亮)의 자는 공명(孔明)인데, '량(亮)'과 '명(明)'은 모두 밝다는 뜻이다. 두보(杜甫)의 자는 자미(子美)인데, 보(甫)는 과거에 남자의 미칭(美稱)이었다. 악비(岳飛)의 자는 붕거(鵬舉)인데, '날다'라는 의미의 '비(飛)와 연관시켜 '붕새(鵬)'라는 글자를 썼다.
자(字)가 이름(名)과 반대의 의미를 갖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은 이름과 자의 균형을 위해서였다. 한유(韓愈)의 자는 퇴지(退之)로, '뛰어나다(愈)'와 '물러나다(退)'가 반대의 뜻을 가져서 상호보완 관계에 있다.
이렇게 이름(名)과 자(字)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후한 시대의 《백호통의(白虎通義)》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본래 '자(字)'라는 한자는 '집(宀)' 안에 '아이(子)'가 있다 하여 '기르다', '양육하다'라는 뜻이다. 후대에 파생된 '글자'라는 뜻 역시, 처음에 있던 글자(文)들에서 새로운 뜻의 글자들이 계속 파생되어 생겨난다는, '번식'이란 의미에서 '글자(字)'라는 뜻이 된 것이다.
아이가 다 커서 성인이 되었을 때 본래의 이름에서 파생하여 상호보완하는 새 이름이 나왔으므로, '자(字)'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시대가 흐르면서 자(字)를 짓는 방식이 다양해지기는 했으나, 본래의 출발점은 이러했다.
3. 백중숙계 : 서열 표시의 기능
주족(周族)에게는 상나라 때부터 이름으로 형제 간의 서열을 표시하던 문화가 있었다. 최소한 3000년의 시간을 넘어서 오늘날 한국의 국어사전에까지 등재되어 있는 '백중숙계(伯仲叔季)'의 관습이다.
'백중숙계(伯仲叔季)'는 맏아들을 백(伯), 둘째를 중(仲), 셋째를 숙(叔), 넷째를 계(季)라고 칭하는 매우 단순한 개념이자 기능이다. 상나라 시절의 주족(周族)은 백중숙계의 글자를 이름에 써서 형제 서열을 표시했다.
<주나라 태왕(太王) 단보(亶父)의 아들들>
※ 태왕 주 단보는 주나라를 건국한 무왕(武王) 발(發)의 할아버지다.
이후 중국식 이름 시스템이 자리를 잡은 삼국지 시대의 오나라 손견의 아들들을 보면 아래와 같이 된다.
<오나라 손견(孙坚)의 네 아들들>
약 천 년의 시간을 넘어, '자(字)'가 형제 간의 서열에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마치 후대에, 이름에 항렬자(行列字/行排字)를 써서 혈족의 배분을 표시한 것과 유사하다.
중국인의 이름은 위진남북조(220-589) 전까지는 한 글자 이름이 주류였고, 당송(618-1279)을 거쳐 14세기 명나라가 되어서야 두 글자 이름이 완전히 보편화 된다. 이름이 한 글자일 땐 그 안에 서열 같은 '기능'을 포함시키기 애매하다. 이름에 항렬자가 쓰인 것은 남북조 때 두 글자 이름이 퍼지고 나서다.
그래서일까? 주나라 때부터 형제 간의 서열―백중숙계(伯仲叔季)―은 한 글자였던 이름(名)이 아닌 자(字)에 포함됐다. 또한 한나라 땐 두 글자짜리 자(字)가 보편화 됐다.
율곡 선생(1536-1584).
성(姓)은 이(李), 이름은 이(珥),
자(字)는 숙헌(叔獻), 호(號)는 율곡(栗谷)이다
자(字)를 통해 서열을 표시하는 습관은 훗날 동양 전체로 퍼졌다. 조선시대의 율곡 선생의 자(字)는 숙헌(叔獻)이었는데, 숙(叔)자에서 알 수 있듯 셋째 아들이었다. 두 형의 자(字)는 백헌과 중헌이며, 동생의 자(字)는 계헌이다.
백중숙계는 다른 여러 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는데, '백부(伯父, 큰 아버지)'와 '숙부(叔父, 작은 아버지)'라는 단어가 여기서 파생됐으며, 막상막하를 뜻하는 '백중지세(伯仲之勢)' 혹은 '백중지간(伯仲之間)'이란 사자성어도 "맏이와 둘째는 큰 차이가 없다"는 뜻에서 나왔다고 한다.
단지 백중숙계를 자(字)에 포함시키는 건 모두가 반드시 지킨 규칙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유명한 인물들의 자(字)가 그렇지 않으며, 아마도 가문의 가풍과 시대의 분위기와 유교의 영향력 같은 것들이 각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싶다.
4. 자(字)와 예절
사실 오늘날의 한국에서도 '이름으로 부모님이나 어른, 상대방을 부르는 것'은 꽤 무례한 행위다. 부모나 어르신, 다 큰 성인을 이름으로 부르기는 그렇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자(字)란 상대를 이름으로 부르기 않기 위해 쓰였고, 이는 피휘의 개념과도 맞아떨어져서 시스템화되고 동양 전체로 퍼졌다. 밖에선 이름 대신 자(字)를 더 많이 사용했으니, 사실상 사회에서 사용하는 이름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겠다.
자(字)를 지을 때는 본명과 연관된 덕목을 포함시켰으며, 앞으로 성인으로서 새겨야 할 의무와 책임을 담아 지어주었다. 그래서 자(字)는 보통 멋이 있었다.
자(字)는 아이와 어른의 존비를 구분하며 사회의 존중을 받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공손하게 부르기 위한 것이었다. 동년배나 윗사람을 부를 때는 이름 대신 자(字)를 불렀다. 윗사람에 한해서는 아랫사람을 이름으로 부르기는 했으나, 황제도 신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는 않았다. (화낼 땐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자(字)로 자신을 부르는 것은 오만하다고 평가됐지만, 흥미롭게도 전장에서 '적'을 향해 외칠 때는 이것이 장점이 되기도 한 것 같다. 적 앞에서 오만하게 '나는 상산의 조자룡이다'라고 외치는 것이다.
* 이미지 출처 : 코에이 삼국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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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는 학식 있는 집안의 성인이라면 당연히 갖는 이름의 3요소(성씨/이름/자)였지만, 모든 사람이 가졌던 것은 아니다. 농부 등 서민 계층은 자(字)가 없는 것이 당연했고,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서민은 본명조차도 갖지 않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체계화 된 이름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귀족이나 가진 자의 것이었다.
단지 서민층도 본명과 자(字)를 갖는 경우가 있긴 한데, 이것은 아마도 본명과 자를 갖는 것을 금지했다기보다는 필요가 없어서, 혹은 사회적으로 안 쓰는 분위기라서, 혹은 문맹이라서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이것은 다음다음 연재인 '아명(兒名)' 편에서 다시 얘기하겠다.
예외로 황제도 자(字)를 갖지 않았는데, 그렇기에 역대 황제들은 그 왕조의 초대 황제를 제외하면 자(字)가 없었다. 유일한 예외가 청나라 마지막 황제다.
지난 연재에서 중국에선 조상의 이름을 물려받지 않는다고 했는데, 자(字)의 경우는 피휘에 해당하지 않기에 물려받을 수 있었다. 일찍이 주나라 때는 자(字)를 자손이 물려받아 씨(氏)로 삼기도 했다.
한중일 3국에는 오늘날까지도 '명자(名字)'라는 단어가 사전에 등재돼 있다. 과거에 '이름(名)과 자(字)'라는 뜻으로 쓰였던 단어가 합쳐져서 현대화된 것이다. 현대의 중국에서는 '성명(姓名)'이란 뜻으로 쓰인다. 현대 한국에서는 '이름' 혹은 '이름(名)을 이루는 글자(字)'라는 뜻이다. 현대 일본에서는 독특하게도 '성씨(名字, 묘지)'라는 뜻으로 변했는데 이건 일본편에서 다시 이야기하겠다.
5. 부록 : 선진 시대의 표기법
성명 시스템은 진시황의 진(秦)나라 전후로 제법 다른데, 시대에 따라 이름과 자를 부르는 순서가 차이가 있다. 진나라 전까지의 선진(先秦) 시대에는 이름(名)과 자(字)를 연이어서 부를 경우, 자(字)의 뒤에 이름(名)을 붙였다.
자료를 보면 선진 시대의 이름은 오늘날처럼 성씨+이름 순으로 표기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공자휘'처럼 '직위 + 이름'이나, '숙량흘'처럼 '자(字)+이름'의 순서가 많아서, 모르는 상태로 보면 가족들의 이름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가 없다.
이건 꽤 흥미로운 이야기인데, 초기의 성씨가 오늘날처럼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이름에 추가로 붙는 식별자가 아니었단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 서양식 성씨나 현대적 성씨와 기원과 기능이 달랐단 걸 보여준다.
진나라 이후로는 이름이 앞에 오고 자(字)가 뒤에 오는 선명후자(先名後字) 방식이 채용된다. '공융문거'나 '제갈량공명'처럼 말이다.
단지 이름을 부르는 건 피하기 때문에 실제로 부를 때는 아마도 '제갈공명'처럼 많이 불렸을 것이고, 위와 같은 표기는 주로 공문서 등에 많이 쓰인 것 같다.
한편 선진 시대 여성의 이름은 성씨와 자를 표기하는 순서가 남성과는 또 달랐다. 자(字)를 먼저 쓰고 뒤에 성(姓)을 붙이는 선자후성(先字後姓)의 방식이 쓰였다. 그리고 선진 시대의 여성 역시 자(字)에 형제의 순서를 표기했다.
이러했던 이유는 고대 중국 여성의 경우 이름(본명이나 자)이 없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이 연재에서 말하는 '최종적인 중국인의 성씨와 이름'의 형태는, 춘추전국시대에 정형화 되는 움직임을 보이다가, 진시황 이후 골격이 완성되고, 한나라를 거치며 자리 잡은 후, 이후의 역사에서 자잘한 수정이 가해지며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이다.
특히 주나라부터 춘추시대까지의 기간에는, 이 연재에서 말하는 '중국인의 성명 시스템'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머물러 있다. 그렇기에 아마 따로 찾아 보실 경우, 당시의 인물들의 이름이 후대의 규칙과는 꽤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실 것이다. 참고하시면 좋겠다.
▶[중국인의 이름(3) : 편하게 짓고 부르는 - 호(號)]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