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字)의 등장 후 1000년이 지나 퍼진 호(號)
성(姓)과 이름(名)은 기원을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 되었고, 씨(氏)나 자(字)는 늦어도 주(周, BC1046-BC256)나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명(名)을 피하는 금기와 사회 예절 때문에 자(字)가 사용되면서 전국시대(BC476-BC221)에 이르면 널리 보급된다. 하지만 '자와 호'라고 흔히 쌍으로 인식되는 '호(號)'의 등장은 시간이 한참 더 흐른 뒤였다.
호(號)의 등장 시기는 이르면 3세기 전후 (혹은 기원전), 늦어도 8세기 전후로, 자료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이름도 아니고 자(字)도 아닌 호칭'을 호(號)라고 보느냐 안 보느냐의 차이인 것 같은데, 예컨대 제갈량의 별명인 '와룡(臥龍)'을 '호(號)'라고 볼 것인가 같은 문제다.
갈홍(葛洪, 283-343)은 최초로 호(號)를 칭한 인물이라고도 일컬어진다.
그의 저서명인 《포박자(抱朴子)》가 곧 그의 자호(自號, 스스로 칭한 호)였다.
당대의 사람들에게 세칭(世稱)되는 별명 따위가 있었다 하더라도, 당시에 그것을 '호(號)'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그것은 호일까? 혹은 이름 같아 보이는 호칭이 두 개라면 나머지 하나를 자(字)라고 해석하고, 자(字)처럼 보이는 게 둘이라면 하나를 호(號)라고 해석하는 게 올바른 해석일까?
사실 과거 인물들의 성씨(姓氏)나 자(字) 역시도 후대의 역사가들이 추측과 해석을 곁들여서 판단한 경우가 제법 보인다. 여기선 보수적으로 접근하겠다.
보통 호(號)는 당나라(618-907) 때부터 유행했다고 말하며, 송나라(960-1279) 때는 보편적으로 퍼졌다고 하니, 확실하게 사회에 보급된 것은 자(字)와 비교하여 1000년 넘게 뒤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무협에서 별호를 외치는 것도 최소한 당나라 이후는 돼야 하는 것이다.
한반도에도 삼국시대에 들어왔다고 하니 역시 당나라 즈음의 영향이었을 것 같다. (중국식 성씨가 들어온 것이 그 무렵이다.)
2. 스스로 짓고 편하게 사용하는 별명 자(字)가 성인(成人)에 대한 사회적 존중을 담은 이름이라면, 호(號)는 자유로운 이름이다. 이름(名)과 자(字)는 부모님이 지어주는 것에 비해서, 호(號)는 스스로 지을 수 있고 남이 지어줄 수도 있으며, 한 사람이 여러 개, 수십 개를 가질 수도 있었다. 짓는 형식이나 글자수의 제한 역시 없으니 자유롭게 지을 수 있었다. 본래는 주로 문인 등이 시나 그림을 그리거나 편지를 주고 받을 때 쓰는 별명으로 활용됐는데, 시를 쓸 때 쓰는 이름인 시호(詩號), 그림을 그릴 때 쓰는 화호(畫號) 등이 있으니 마치 오늘날의 필명, 예명, 인터넷 닉네임이 과거의 현실에서 사용됐단 느낌이다. 영어로 호(號)는 'art name'이라고도 번역된다. 그저 자기 취향에 맞는 이름을 짓고 싶었을 수도 있고, 예술 활동을 할 때 필명을 쓰고 싶었을 수도 있으며, 은거한 뒤 알려진 이름을 쓰기 싫었을 수도 있고, 남들이 그렇게 부르다 보니까, 아니면 사는 곳의 특징으로 불리다 보니 그것이 호(號)로 정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호(號)에는 자연스럽게 성격, 취향, 능력, 사상, 특징 등의 요소가 포함되었다. 스스로 지으면 자호(自號)이고, 남이 지어주면 외호(外號)이며, 우아(優雅)하게 지어서 아호(雅號)이고, 남이 별명으로 불러 작호(綽號,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이니, 당나라를 전후로 이런 다양한 종류의 별칭들을 호(號) 또는 별호(別號)라고 불렀다. 무협에서 말하는 별호도 여기에 해당한다.
신사임당의 '사임당'은 이름이 아니라 호(號)다.
과거의 호(號)는 현대의 우리도 살면서 종종 그 흔적을 보게 된다. 예컨대 중국 요리 '동파육(東坡肉)'을 만들었다는 소동파(蘇東坡)의 본명은 소식(蘇軾)인데, 그의 호(號)가 동파거사였다. 이름이나 자(字)보다 호(號)가 더 유명해진 경우다.
우리에게 더 익숙한 인물들을 보면, 정약용의 호는 다산(茶山), 이황의 호는 퇴계(退溪), 이이의 호는 율곡(栗谷)이고, 서예가로 유명한 한석봉의 본명은 사실 '한호'로, 석봉(石峯)은 호(號)다. 또한 추사(秋史) 김정희의 호는 적어도 500개가 넘기로 유명하다.
북제의 안지추(顏之推, 531-?)가 썼다고 알려진 《안씨가훈(顔氏家訓)》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름(名)과 자(字)의 성질에 대해서 설명한 문장이다.
그리고 후대의 중국인들은 이 뒤에 한 문장을 더 붙였다.
이렇게 이름(名)과 자(字)와 호(號)라는 세 요소가 모여서 한 사람의 이름을 이루니, 동양에 널리 퍼져서 사람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호칭들로 사용되었다.
이름과 자가 사용에 엄격한 제약이 있었다면, 호(號)는 상대가 누구든 사석에서는 자유롭게 사용하는 이름이었다. 특히 시간이 흐르며 자(字)는 동년배끼리도 사석에서 함부로 부르기 어려운 격식 있는 이름으로 변해갔는데, 그 자리를 대신해 상대가 누구든 편하게 부를 수 있고, 스스로를 자칭할 수도 있던 편한 호칭이 바로 호(號)였다.
3. 편하지 않은 호(號) 호(號)라는 글자는 '부르다', '외치다' 같은 뜻인데, 좁게 보면 개인의 별호(別號)가 있겠지만, 넓게는 더 다양한 분야의 호(號)가 존재한다. 사실 사람을 부르는 호(號)가 쓰인 것은 '개인의 편한 별명'이 처음은 아니다. 그 이전의 고대 주나라 때 '죽은 자에게 하사하는 이름'이 있었으니, 이것을 '시호(諡號)'라고 한다.
시호(諡號)
시호는 조정에서 죽은 자의 행적을 평가하여 내리는 이름으로, 일반적으로 황제를 포함한 고위 관료나 저명 인사들에게 주어졌다. '시(諡)'란 영예로운 칭찬으로, '시호(諡號)'란 죽은 자에게 주는 영예로운 호(號)라고 할 수 있겠다. 시호는 피휘 목적보다는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서 쓰였다.
역대 제왕이나 제후들을 부르는 호칭은 사실 많은 경우 본명이나 당대의 호칭이 아니다. 예컨대 춘추시대 노나라의 '환공(桓公)'이란 호칭은 사후에 주어진 시호(諡號)다. 유비의 '소열황제(昭烈皇帝)'나 조조의 '무황제(武皇帝)' 역시 시호다.
우리에게 익숙한 신라 29대 무열왕의 무열(武烈)도 시호이며, 조선의 명장 이순신의 충무(忠武)도 시호에 해당한다.
참고로 여러 번 다룬 제갈량의 경우 후대엔 '제갈무후'라고도 불리는데, '무후(武侯)'란 호칭은 생전의 작위인 '후작(侯爵)'과 사후의 시호인 '충무(忠武)'에서 나온 것이다.
묘호(廟號)
시호보다 먼저 왕의 사후에 쓰였던 이름이 있으니 사당 묘(廟)자를 써서 '묘호(廟號)'라고 한다. 종묘와 같은 사당에 모셔질 때 쓰이는 이름이다. 상나라 때부터 존재했다고 말한다.
황제나 왕들을 부르는 '태조', '세종' 같은 호칭들은 대부분 사후의 '묘호(廟號)'다. 예컨대 당나라 현종(玄宗)이란 유명한 호칭은 묘호이며, 명나라 주원장의 묘호는 '태조(太祖)'다.
묘호의 두 글자 중 앞글자는 치세와 업적을 평가하여 정해지고, 뒷글자는 본래는 종법에 기반하여 '조'나 '종' 중에서 선택됐다. 개국 군주의 묘호가 모두 '태조'가 되는 것도 이런 규칙 때문이다.
주나라 때는 묘호를 사용하지 않았고, 진시황은 시호와 묘호를 둘 다 폐지했었지만, 한나라 때 모두 복원되었다. 이후론 시대에 따라서 차이가 있는데, 결국 동양의 군주국들 사이에선 널리 사용된다. 원래는 황제에게만 붙일 수 있었지만, 주변국에서는 왕에게도 다 붙였다. 조선의 '세종'도 묘호에 해당한다.
연호(年號)
과거 동양 군주제 국가에서 특정 군주의 치세 동안 연도를 세는데 붙이던 호칭이다. 한나라 때 시작되어 명/청대에 가서 오늘날 생각하는 연호로 안정됐다.
앞서 본 시호(諡號)나 묘호(廟號)는 사후에 부여되는 호칭이며, 생전에 부여되는 존호(尊號) 같은 것들은 갈수록 너무 길어졌다. 당나라 현종의 존호는 '개원천지대보성문신무증도효덕황제(開元天地大寶聖文神武證道孝德皇帝)'였으니, 일상에서 쓰기엔 너무 길었다.(근데 일상에서 황제를 이름 같은 걸로 부를 일이 별로 없긴 하다.)
그래서 재미있게도, 연호가 있는 경우 황제들은 연호로 많이 불렸다. 예컨대 명 태조 주원장은 연호가 '홍무(洪武)'였기에 '홍무제'라고 불린다. 청나라 '건륭제'의 '건륭(乾隆)' 역시 연호로, 묘호는 고종(高宗)이다. 영락제, 강희제 등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4. 다양한 분야에 널리 사용된 호(號) 호(號)라고 불린 호칭은 너무 다양하기에 종교까지만 언급하고 마무리를 짓겠다. 종교에 관련된 이름들 역시 자(字)나 호(號)라고 불렸는데, 예컨대 불교에 출가하여 받은 이름이 법명(法名)이라면, 불교 승려의 자(字)는 법자(法字)이고, 호(號)는 법호(法號)다. 무협에서 익숙한 도호(道號) 역시 도교에서 주는 이름이다. 과거엔 기독교의 세례명도 호(號)의 일종으로 본 것 같다. 참고로 종교쪽의 자(字)와 호(號)는 경계가 불분명하기에 같다고 보는 경우도 많다.
전진교를 창시한 왕중양(王重陽)의 본명은 왕중부(王中孚)로,
그의 도호가 중양자(重陽子)였기에 왕중양이라 불렸다.
호(號)는 성별이나 신분과 무관하게 사용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글자를 아는 지식인 층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자(字)나 호(號) 등 이름 시스템이 백성에게 널리 보급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전근대 사회의 높은 문맹률도 기여했을 것이다.
또한 호는 범위가 매우 넓은데, 위에서 잠시 언급했던 작호(綽號)를 보면 상대방을 칭찬하는 좋은 별명부터 놀리거나 비하하는 나쁜 별명까지도 포함하여, 말 그대로 오늘날의 '별명'과 굉장히 유사하다. 아호의 경우는 오늘날의 필명 등과도 공통점이 많다. 어찌 보면 호(號)라는 것은 그저 형태만을 달리해서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필명'이나 'ID', '닉네임'이란 형태로 말이다.
지금까지 이름을 중시하고 그래서 오히려 피하는 주술적 믿음과, 본명 대신 사용하는 자(字)와 호(號)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자(字)는 성인이 되어 받는 이름이고, 호(號) 역시 나이가 어릴 때에는 보통 없었다.
그렇다면 '본명을 피하는 문화권'에서 어린 시절에는 사람을 어떻게 불렀을까? 다음 연재에서는 어릴 때의 이름인 아명(兒名)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중국인의 이름 (4) : 태어나면 임시로 짓는 - 아명(兒名)]으로 이어집니다.◀
갈홍(葛洪, 283-343)은 최초로 호(號)를 칭한 인물이라고도 일컬어진다.
그의 저서명인 《포박자(抱朴子)》가 곧 그의 자호(自號, 스스로 칭한 호)였다. 2. 스스로 짓고 편하게 사용하는 별명 자(字)가 성인(成人)에 대한 사회적 존중을 담은 이름이라면, 호(號)는 자유로운 이름이다. 이름(名)과 자(字)는 부모님이 지어주는 것에 비해서, 호(號)는 스스로 지을 수 있고 남이 지어줄 수도 있으며, 한 사람이 여러 개, 수십 개를 가질 수도 있었다. 짓는 형식이나 글자수의 제한 역시 없으니 자유롭게 지을 수 있었다. 본래는 주로 문인 등이 시나 그림을 그리거나 편지를 주고 받을 때 쓰는 별명으로 활용됐는데, 시를 쓸 때 쓰는 이름인 시호(詩號), 그림을 그릴 때 쓰는 화호(畫號) 등이 있으니 마치 오늘날의 필명, 예명, 인터넷 닉네임이 과거의 현실에서 사용됐단 느낌이다. 영어로 호(號)는 'art name'이라고도 번역된다. 그저 자기 취향에 맞는 이름을 짓고 싶었을 수도 있고, 예술 활동을 할 때 필명을 쓰고 싶었을 수도 있으며, 은거한 뒤 알려진 이름을 쓰기 싫었을 수도 있고, 남들이 그렇게 부르다 보니까, 아니면 사는 곳의 특징으로 불리다 보니 그것이 호(號)로 정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호(號)에는 자연스럽게 성격, 취향, 능력, 사상, 특징 등의 요소가 포함되었다. 스스로 지으면 자호(自號)이고, 남이 지어주면 외호(外號)이며, 우아(優雅)하게 지어서 아호(雅號)이고, 남이 별명으로 불러 작호(綽號,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이니, 당나라를 전후로 이런 다양한 종류의 별칭들을 호(號) 또는 별호(別號)라고 불렀다. 무협에서 말하는 별호도 여기에 해당한다.
신사임당의 '사임당'은 이름이 아니라 호(號)다.3. 편하지 않은 호(號) 호(號)라는 글자는 '부르다', '외치다' 같은 뜻인데, 좁게 보면 개인의 별호(別號)가 있겠지만, 넓게는 더 다양한 분야의 호(號)가 존재한다. 사실 사람을 부르는 호(號)가 쓰인 것은 '개인의 편한 별명'이 처음은 아니다. 그 이전의 고대 주나라 때 '죽은 자에게 하사하는 이름'이 있었으니, 이것을 '시호(諡號)'라고 한다.
| ※ 내용 수정에 대한 안내 : 앞서 언급했듯이 '호(號)'라는 단어가 사람의 칭호를 지칭하게 된 것은 당나라 전후입니다. 지금부터 설명할 '시호(諡號)'나 '묘호(廟號)'에는 '호(號)'란 글자가 붙어 있는데요. 예컨대 상나라나 주나라 때에는 '시호'라는 개념은 있었지만, 이것을 '시(諡)'라고 언급하지 '시호(諡號)'라고는 언급하지 않았던 걸로 보입니다. 즉, '시호'나 '묘호'의 개념은 고대부터 존재해서 천천히 발전하고 정비되었으나, 이 단어들의 뒤에 '호(號)'라는 글자가 붙은 것은 후대에 가서입니다. 아마도 기원후에 붙은 것으로 보이는데 확실하진 않습니다. 이 연재에서 제가 확답 드릴 수준은 되지 못하나, '시호'와 '묘호' 등의 개념은 고대부터 존재했으되, '호(號)'라는 글자가 붙어서 보편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기원후 혹은 당나라 즈음부터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4. 다양한 분야에 널리 사용된 호(號) 호(號)라고 불린 호칭은 너무 다양하기에 종교까지만 언급하고 마무리를 짓겠다. 종교에 관련된 이름들 역시 자(字)나 호(號)라고 불렸는데, 예컨대 불교에 출가하여 받은 이름이 법명(法名)이라면, 불교 승려의 자(字)는 법자(法字)이고, 호(號)는 법호(法號)다. 무협에서 익숙한 도호(道號) 역시 도교에서 주는 이름이다. 과거엔 기독교의 세례명도 호(號)의 일종으로 본 것 같다. 참고로 종교쪽의 자(字)와 호(號)는 경계가 불분명하기에 같다고 보는 경우도 많다.
전진교를 창시한 왕중양(王重陽)의 본명은 왕중부(王中孚)로,
그의 도호가 중양자(重陽子)였기에 왕중양이라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