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의 팬으로서 바라보는 단어 : 유기체(Organism)
2025년 04월 18일 · 오전 12시 00분
※ 이 글은 지난 번의 [유기체(有機體)와 유기물(有機物)]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1. 탄소에 기반한 생명체(Carbon-based life) SF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마도 '탄소 기반 생명체(Carbon-based life)'란 표현이 매우 익숙하실 것이다. 그렇다. 바로 지구에 사는 생명체들, 우리들을 말한다. 우리는 모두 탄소 기반 생명이다. 탄소가 우리의 핵심 구성 요소가 된 이유를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탄소는 원자번호 6번으로 너무 크지도 작지 않은 적절한 크기이며, 탄소는 자연의 순환 시스템에 널리 풍부하게 존재하고, 아주 많은 종류의 화합물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안정적이고, 반응을 할 때 필요한 에너지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기 때문이다.
원자 번호 6번, 탄소. 지구 생명의 근간.
물론 지구 상의 생명체 탄생에 정확히 어떤 이유들이 작용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최근 급부상하는 생명 물질 외계 기원설도 있고 말이다. 그럼에도 탄소 화합물이 생명체의 기반이 되기에 가장 적절했다는 것은 분명 큰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비탄소 기반 생명체가 존재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은 것 같다.) 이 부분을 자세히 공부해 보면 탄소는 생명이 활동하기 위해 정말 납득이 절로 가는 절묘한 특성들을 갖고 있는데, 사실 필자도 배운지 너무 오래 돼서 가물가물하니 이쯤 짧게 하겠다. SF에서 흔히 언급되는 '실리콘 기반 생명체'란 것도, 탄소와 그나마 유사한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언급되는 것이다. 탄소만은 못하지만 굳이 말하면 가능성이 있긴 하달까. 만일 비탄소 기반 생명체와 조우한다면?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용어인 '유기체(Organism≒생물)'는 결국 탄소와 연관되어 있다는 뉘앙스를 갖고 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우주에 진출해서 외계 생명체들을 많이 만나고, 그들 중 일부가 탄소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 이미지 출처 : 스텔라리스 SF 배경의 게임이나 영화에선 무기물 기반의 생명체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필연적으로 유기체라는 단어는 생명체와 동의어가 아니게 될 것이다. 탄소 기반 생명체에 한정 짓는 단어로 변할 수 있다. 단어의 정의라는 건 이렇게 재미있다. SF에는 수많은 외계 종족이 나온다. 인상 깊었던 것으로 '스텔라리스'에서 보았던 플라즈마 기반 생명체가 있었다. 거대 플라즈마 구름 속의 전기 신호가 패턴과 구조를 이루어 지성을 형성했다는 설정. 그럴 경우 생명이란 개념은 완전히 재정의 되어야 하고, SF 작가라면 '유기체'란 단어를 어떻게 쓸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2. 넓은 의미에서의 유기체(有機體)와 기계(機械) 앞서 언급했듯이, '유기체'의 원래 의미는 "부분과 전체가 하나의 시스템을 이루는 조직체"이다.
유기체(有機體) 1. 많은 부분이 일정한 목적 아래 통일ㆍ조직되어 그 각 부분과 전체가 필연적 관계를 가지는 조직체. 2. (생명) 생물처럼 물질이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생활 기능을 가지게 된 조직체.
[표준국어대사전]
철학에서는 위의 정의 중 1번에 해당하는 원래의 넓은 뜻을 여전히 사용하며, 일상에서도 드물게 사용된다. 예컨대 지구나 우주 전체를 하나의 유기적 시스템으로서의 유기체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유기적 시스템을 가진 존재들을 유기체로 바라보는 것은 작가로서 매우 흥미로운 일이겠지만, 멀리 갈 것 없이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기계를 유기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란 부분이다.
컴퓨터 역시 하위 부품들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구성된 시스템이다. 애당초 유기(organ-)라는 단어의 뜻의 일부가 '기계'이니...
생명으로서의 로봇과 인공지능 결국 미래에 우리는 인공지능과 로봇을 생물이자 지성체로 인정할 수 있느냐란 문제를 다뤄야 할 것이다. 이건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과학적인 개념으로서도 문제가 된다. 예컨대 현재의 '생물'의 정의를 보자.
생물(生物, organism) - 생명을 가지고 스스로 생활 현상을 유지하여 나가는 물체. 영양ㆍ운동ㆍ생장ㆍ증식을 하며, 동물ㆍ식물ㆍ미생물로 나뉜다. (표준국어대사전) - 비생물에 대응되는 말로 생장 ·생식 ·진화 ·자극 반응성 등의 특징을 갖는다. (두산백과)
포괄적 의미로 보면 생물은 생장/생식/자극 반응성/진화/적응 등의 특성을 갖는 존재로, 저런 조건을 따지면서 지구상의 존재 중 바이러스 같은 것들은 생물에 포함시키느냐 마느냐의 논쟁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만일 기계와 인공지능이 충분히 발전해서 '생장/생식/자극 반응성/진화/항상성/적응' 같은 특성을 가지게 되는 날은 어떻게 될까? 이 날은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언젠가 반드시 오게 돼 있다. 그 날엔 자연에서 유래한 생명의 정의를 다시 해야하겠지만, 기계에서 유래한 '저것들'을 생명에 포함시켜야 할지가 당연히 논의될 것이다. 매스 이펙트에서 나온 주제 중 하나도 그것이었다.
※ 출처 : 매스 이펙트 LE 인간이 만든 기계는 영혼을 가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날엔 당연히 유기체(Organism)란 단어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될 것인데, 다시금 말하지만 '유기체(有機體)'라는 한자어의 '기(機)'는 이미 기계(機械)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기계처럼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조직체'란 뜻이니까. 요약하면 '유기체(Organism)'란 애당초 기계를 포함하는 어원을 갖는 단어이며, 언젠가 기계는 '생명체'로 간주될 수준에 오를 것이란 얘기다. 이건 참으로 SF 팬들이 타오르게 만들 주제이고, 그래서 수많은 SF에서 다뤄지곤 하는 주제이다. 3. 군체로서의 유기체 마지막으로 군체(群體, Colony)를 보자. 곰팡이나 산호나 개미 같은 다양한 개념의 군체 생물 집단이 존재하는 것을 우린 알고 있다.
군체(群體) [표준국어대사전] 1. 생명 같은 종류의 개체가 많이 모여서 공통의 몸을 조직하여 살아가는 집단. 해면, 산호 따위와 같은 무척추동물과 세균, 곰팡이 따위와 같은 미생물에서 볼 수 있다. 2. 생명 같은 종류의 개체가 모여 일을 분담하여 사회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집단. 꿀벌, 개미, 흰개미 따위에서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사회적으로 군집을 이루고 사는 집단인 개미나 벌 같은 군체 사회를 Superorganism(초개체)라고 부른다. 집단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움직이기에 군체 전체를 하나의 생물로 보고자 하는 시각이다.
이런 사회적 군체는 SF에서는 매우 매력적으로 흔하게 다뤄지는 소재다. 바로 저그와 같은 하이브마인드에 의해 통제되는 군체 집단이다. SF에서의 군체 SF에 나오는 판타지적인 군체의 일반적인 특징이 있다. 바로 말단 개체 하나하나에 의지나 자아가 없다는 점이다. 예컨대 개미를 보면 개미 집단은 전체가 하나의 초개체(superorganism)이지만, 개미 한 마리를 두고도 유기체(=생물, organism)라고 부른다. 하지만 SF나 판타지의 경우 일반적으로 말단 개체는 스스로의 의지가 없거나, 혹은 있더라도 정신 지배 같은 것을 당해서 완전히 무리의 일부로서만 존재하는 상태인 것이 특징적이다. 그저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
※ 이미지 출처 : 스타크래프트2 지난 시대에 SF적인 군체를 대표했던 저그. 저그는 군체에서 제외될 경우 독립적 개체가 될 수 있단 설정 같다.
세부 설정은 작품마다 달라서, 군체의 지배를 벗어나면 독립된 개체로서 각성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군체의 지배가 끊기면 인형처럼 자리에서 쓰러져서 죽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거대 로봇 군단 같은 것도 일종의 군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집단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로서만 존재할 경우, 유기체(organism)란 단어는 생물보단 조직성에 더 관점을 둔다. 마찬가지로 SF 작품에서는 생각해 볼 거리가 된다. 4. 마치며... 너무 자세하게 들어가긴 그래서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들만 살펴 봤다. 유기체(organism)란 단어는 이처럼 SF 장르에서 참 이래저래 생각해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용어이다. 아마도 '도구'와 '조직성'이란 어원과 현재 사용되고 있는 '생명체'란 뜻 사이에 묘하게 큰 격차가 있기 때문일 것 같다. 인간이 학문을 발전시켜 온 과정에서 과거의 정의가 틀렸거나 바뀌게 되었을 때 나중에 가서는 의미가 바뀌거나 중첩된 용어가 생겨나곤 하는 것 같다. 과거엔 당시의 과학 지식이나 개념이 오늘날 이렇게 바뀔지 몰랐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SF는 과학적으로든 철학적으로든 타 장르보다도 상상과 사유를 뻗어 나가기가 쉽다는 것이 매력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매스 이펙트를 하다가 눈에 걸렸던 '유기체(Organism)'란 단어에 대해서 끄적여 보았다. :)
잡담 2025-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