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공룡 둘리 40주년 애장판
2025년 05월 24일 · 오전 10시 00분
몇달 전에 '아기공룡 둘리'(이하 '둘리') 40주년 애장판 예약이 시작되었고, 최근에 배송이 왔습니다.
둘리는 제 또래 근처 세대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어렸을 적 추억의 만화일 겁니다. 슈퍼보드라거나 하니라거나 원더키디처럼 강하게 뇌리에 남은 한국 만화가 없는 건 아니지만 둘리만큼은 아닐 테죠. 둘리는 1983년 4월부터 1993년 8월까지 무려 10년 동안 연재됐던 장기 연재작입니다. 아마 저는 보물섬 연재와 단행본, 그리고 87년도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자랐을 거예요. 한참 나중에 '얼음별 대모험'(1996)이란 극장판이 나왔지만 그땐 많이 컸기 때문에 더 이상 보지 않았죠. 아무튼 둘리 애장판은 이런저런 걸 모으는 성격에 거를 수가 없었고, 기대반 걱정반을 하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다 읽었네요.
'어른이 돼서 둘리를 다시 읽었을 때'에 대한 인터넷의 소문으로, 다 커서 둘리를 보면 사실 고길동은 살아 있는 부처에 가깝고 둘리는 악마 그 자체란 얘기가 있습니다. 저도 달라 보이게 될 부분을 꽤 기대하며 책을 펼쳤죠. 그런데 저 '소문'은 과장되었거나 혹은 인터넷 특유의 '밈'화가 된 비꼬고 또 비꼰 평가란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원작 만화 기준으론 고길동은 본바탕이 나쁘진 않지만 부처라거나 착한 사람까진 아니고요. 둘리 역시도 악마 같은 면모가 없는 건 아니지만 착하고 순수한 모습도 많이 있더군요. 오히려 작품 전체에 걸쳐 사랑받고 싶어하는 모습을 유지하죠.
둘리와 고길동의 관계는 뭐랄까... 서로가 서로를 더 나쁘게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를 보는 것 같았어요. 둘 다 처음엔 그렇게 나쁜 성격은 아니었는데, 서로에 대한 증오의 연쇄를 깨지 못하고서 증폭되는 그런 모습을 마지막까지 보여줍니다. 간혹 한쪽이 마음을 고쳐먹고 잘 지내보려고 해도 다른 쪽이 그걸 거부하면서 관계 회복은 되지 않고요. 어찌보면 전형적인 인간관계의 모습이죠.
둘리야 태생이 특수하지만, 고길동을 보면 딱히 착하지도 그렇게 악하지도 않은 평균적인 한국 아저씨의 모습을 그려낸 것 같습니다. 단지 전 어른이 어른 대접을 받는 건 어른답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물론 자기 가족도 아닌 부랑아나 떠맡겨진 아이를 4명이나 맡아서 키운다는 것 자체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만... 고길동 본인이 (아무리 개그 만화라고 해도) 요즘으로 치면 아동 학대와 폭행으로 잡혀갈 수준의 화풀이와 폭력을 둘리 등에게 휘두르는 모습은 2025년 기준으로는 매우 거슬립니다. 나이가 든다고 누구나 어른이 되는 건 아니란 걸 보여주는 묘사일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아무 이유도 없이 자기 기분이 나빠서 아이들을 때리는 장면은 좀 그래요. 어릴 적 추억이 파괴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
저는 김수정 작가님의 만화를 둘리 말고는 알지 못하는데요. 김수정 작가님이 1950년생이라고 하시니, '아기공룡 둘리'는 30대 초중반에 연재를 시작한 만화입니다. 지금 와서 '둘리'를 보면 인간에 대한 묘사나 사회 문제라거나 정치 등에 대한 풍자를 넣고 싶어하셨던 것 같아요. 그 중에서도 반짝반짝하게 예쁘고 기분 좋은 이야기보다는, 사회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분위기를 좋아하셨을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 블랙 코미디나 성인 조크를 좋아하시는 느낌도 드러나죠. 뭐랄까 역시 사람이 30대가 되면 어느 정도 자기 사상이나 철학이 정립된다는 게 작품들 속에서 느껴집니다. 남자 아이들이 악동 캐릭터를 정말 좋아한단 걸 30대 초에 깨달으셨던 김수정 작가님이 대단하단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람은 나이에 따라 좋아하는 인물이 계속 바뀌는 것 같아요. 저는 어릴 땐 악동을 좋아했고, 20대 전후론 성장하고 고민하는 주인공을 좋아했고, 30살 전후론 시니컬한 캐릭터를 좋아했죠. 지금은 명확히 떠오르는 건 없군요. ^^;
(아마) 걸프전을 테마로 한 에피소드. 뒤에 나오는 '개' 장면은 아동 만화치곤 센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과 관련된 작가님의 말씀(인터뷰) 두 가지가 기억에 남는데요. 하나는 검열이 너무나 심했다는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1987년도판 애니메이션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개인적으로 둘리는 저 두 가지 덕분에 더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라 추측됩니다. 이유는 특히 중후반부부터 드러나는 사회 풍자나 냉소적인 모습은 아이들 만화에 나올 건 아니었어요. 작가님의 성향이 제 예상만큼 냉소적라면 검열 없이는 처음부터 너무 날카롭고 부정적인 내용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만화를 보면서 애니메이션판이 계속 생각이 났는데, 애니메이션에서 수정되거나 추가된 내용들은 적어도 아이였을 때 보기엔 훨씬 더 좋은 작품이 되었었다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다 보고 나니 애니메이션 제작진이 조금 존경스러워지더군요. (원작자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건 참으로 아쉽습니다.) 물론 저도 80년대에서 90년대의 검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반대로 그 부당함에 맞선 싸움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당사자가 아니면 상상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하지만요. 그럼에도 저 두 요소는 둘리 원작의 성공에 긍정적 영향을 줬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기억하는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 "꼴뚜기 별의 왕자님". 애니판의 완성도는 정말 대단했죠.
둘리를 다시 보고 느낀 가장 큰 아쉬운 점은, 제가 보기에 둘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뼈대가 정해져 있질 않았어요. 처음 연재를 시작했던 1권의 내용이 제일 좋고, 사전에 가장 준비가 많이 됐던 초기의 설정과 이야기가 뒷이야기를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1권은 지금 봐도 정말 재밌더군요. 단순 계산으론 첫 2년 동안의 연재분이겠죠. 2권부터는 점점 재미가 없어지는데, 가장 큰 이유는 둘리에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게 뭔지를 정확히 모르셨거나, 혹은 너무 많아서였거나일 것 같습니다. 잘 만든 이야기는 적어도 그 뼈대만큼은 명확하게 서 있고 불필요한 요소가 적죠. 장기 연재였기는 했지만, 둘리는 말 그대로 너무 에피소드나 분위기가 난잡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악동들과의 일상 이야기를 깔고서, 아마도 전통과 판타지와 SF를 넘나드는 모험 이야기를 하고 싶어셨던 것도 같아요. 도우너의 타임 코스모스는 그걸 위한 설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정치와 사회와 인간사를 풍자하고 싶으셨고요.
문제는 저것들이 모두 뒤죽박죽 섞여 있는데, 뼈대도 없고 흐름도 일관되지가 않습니다. 심지어 1권과 중반과 후반을 비교하면 '둘리'라는 주인공 캐릭터의 성격조차도 굉장히 달라지고요. 개연성이 떠오를 수준으로요. 80년대 한국 만화를 나이가 들어서 재조명해 본 적은 별로 없지만, 예컨대 요전에 얘기했던 '달려라 하니'와 비교해도 스토리나 완성도면에선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뭐랄까 '둘리'라는 환경을 만들어두고서 하고 싶은 걸 이것저것 다 해보려다가 결국 통일된 뭔가를 만들어내진 못했달까요. 하다못해 둘리나 여러 캐릭터들에게 뚜렷한 목표나 꿈, 고민 같은 게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나마 목표를 가진 건 도우너 말고는 없기에 이야기에 방향성이 없었습니다. 어떤 아이디어가 오직 캐릭터의 힘만으로 움직이는 느낌이었달까요. 한 마디만 더 하면, 아마도 인기나 흐름을 의식하셨는지 몇몇 추가 캐릭터가 중간중간 도입되는데요. 전부 다 성공적이지 못했죠. 오히려 거슬리는 면이 강했습니다. 이건 아마 작가님의 시니컬한 성향이 더 본질적으로 드러나서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듭니다. 음... 이런 얘긴 여기까지만 하죠.
어렸을 때 가졌던 이미지와 의외로 꽤 다른 것들도 있는데, 둘리가 '호이'하면서 초능력 쓰는 장면이 은근히 별로 없습니다. 사용해도 의식적으로 쓰기보단 무의식적으로 써서 사고가 나는 느낌이 더 강하네요. 또 하나 이미지랑 달랐던 건, 초반부를 보면 둘리가 정말로 '공룡' 같습니다. 뒤로 가면서 인기와 피드백을 따라 변해간 것 같아요. 도우너도 첫 등장은 정말 인간과 전혀 다른 짐승(외계인) 같아 보이고요. 또치도 동물이란 느낌이 정말 강하더군요. 또한 당시엔 몰랐지만 희동이는 정말 끝까지 '아기'인 게 지금 와선 정말 이상했습니다. 사람은 만 1세만 돼도 아기 같은 모습이 거의 없어지거든요.
아무튼 오랜만에 둘리를 다시 봤네요. 중산층 회사원의 가정에 불청객 세 명이 들어와서 툭닥거리는 모습이 담긴 인간 드라마였고요. 전통과 판타지와 SF가 섞인 모험담이기도 했습니다. 1권에서 특히 추억이 물밀듯이 밀려왔는데, 변신 자동차 에피소드랑 꼴뚜기별 에피소드는 어렸을 때 너무 너무 좋아했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더불어서 의외로 만화 전체의 내용을 제가 다 알고 있었고, 완결까지 다 따라가면서 봤었다는 것도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오히려 지금 와선 재미없게 본 후반부도 어렸을 때는 그냥 악동들이 뛰어노는 모습이 마냥 좋았던 것 같아요. 굳이 주제를 하나 찾자면 "인간 관계에서 증오의 연쇄를 끊을 수 있을까?"란 문장이 떠오르네요. 적어도 원작 만화를 보고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아마 애니메이션(1987)은 좀 다른 느낌일 것 같습니다.
인간이란 게 참 평생의 기억 중에서 10대까지가 이렇게 소중하다는 게 너무 신기한 것 같아요. 제가 살면서 지켜본 저보다 나이가 많은 모든 사람들도,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10대 때 살았던 자신의 환경과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하더라구요. 아무튼 다시 봐서 좋았습니다. 뒤로 갈수록 좀 아쉽긴 했지만, 특히나 1권은 너무 재밌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2008년에 'NEW 아기공룡 둘리' 애니메이션이 나왔단 걸 알게 되긴 했는데, 찾아보진 않을 것 같네요. 김수정 작가님도 이제 70대이시겠네요. 어린 시절 둘리 덕분에 정말 재밌었습니다. 만수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