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어투'란 주제를 약 30년간 지켜 보고서 쓰는 잡담
2025년 07월 02일 · 오전 7시 00분
제가 일본어에 관심을 갖고서 '번역어투'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지 대략 25~30년 정도 지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아마 이 주제가 논의된 건 더 오래 됐을 것 같은데요. '번역어투'라는 건 우리가 한국어를 사용할 때, 원래의 한국어의 용법이 아니라 외국어에 영향을 받아서 '잘못된 말투'를 쓰고 있다는 개념입니다. "한국어가 외국어 직역에 오염되어서, 원래 한국어에서 쓰지 않던 방식으로 말하게 됐다"는 이야기죠. 아마 다들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보실 정도로 유명한 얘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꼭 일본어에 한정된 이야기도 아니구요. 현대 한국에선 영어의 영향이 (아마) 더 큽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꼽히는 것이 아래 표현일 겁니다.
외국어 표현과 자주 번역되는 패턴잘못된 이유
one of the best → 가장 ~하는 것들 중의 하나한국어의 '가장'은 유일한 것이라 여러 개가 될 수 없음.
しなければならない → ~하지 않을 수 없다 (시나케레바나라나이)한국어에서 본래 사용되지 않던 패턴. '해야(만) 한다'라고 쓰는 게 올바른 한국 표현.
'번역어투'라는 것엔 굉장히 다양한 표현들이 포함돼서, 하나하나 다 찾아 보시면 "아니 이런 것까지?"라고 생각하실 것들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이건 주로 번역가들 사이에서 꽤 심각하게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이고요. 과거부터 지금까지 관련된 서적도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저도 언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니 꽤 어렸을 때부터 여러 권 사서 봤죠. 아래보다 훨씬 많이요. ^^;
사실 이 글도 최근에 번역가 황석희씨의 에세이를 사서 읽다가 문득 다시 들었던 생각입니다.
제가 처음 이 주제에 대해 들었을 때는 그냥 "그런가보다"라고 했었고, 일본어를 한창 공부할 때는 '한국어를 지키는 것'과 '일본어의 뉘앙스를 잃지 않는 것'사이에서 방황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약 30년이 지나서, 지금은 솔직히 "아무래도 좋지 않나?"란 느낌입니다. 솔직히 이 주제는 번역가들이 일반인들에게 너무 민감하고 엄격하게 말하고 있는 것도 같아요. '올바른 한국어'라는 게 무엇일까요? 원칙적으로 말하면 현재의 국어 교육과 국립국어원 등의 기관에서 정하고 있는 한국어 문법과 어휘, 표현 등등에 걸맞는 한국어일 겁니다. 거기서 벗어나면 '올바르지 않은 한국어'가 될 테고요. 표준어나 맞춤법 같은 것이 기준이 되겠죠. 개인적으론 언어를 배우고 습득해 가는 10대까지는 이 원칙을 반드시 지키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걸 불변의 진리로서 천년만년 지켜나가는 것이 '올바른 한국어'일까요? 오랫동안 언어 그리고 역사에 대해 보고서 느낀 것은, 언어란 건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들고 수정해 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언어는 자연 발생한 후 자연스래 변해 가는 것이며, 그 흐름에 인위적으로 손을 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 변천사에서 볼 수 있죠. 국립국어원은 표준어와 맞춤법을 계속 수정해서 발표하는데, 그 이유는 말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표준어의 정의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사용하는 서울말'인데, 그 '두루 사용한다'는 개념이 계속 변하는 거죠. 언어란 게 통제를 통해서 유지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표준어'의 변화에 대해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죠. 당연하지만 표준어로 인정되기 전엔 '잘못된 한국어'였다는 의미입니다. ◆ 표준어가 아니었다가 복수 표준어로 인정된 경우
새로 인정된 표준어기존의 표준어
짜장면 (2011)자장면
간지럽히다 (2011)간질이다
걸리적거리다 (2011)거치적거리다
위와 같은 복수 표준어가 꾸준히 논란이 되는 이유는, 좌측이 틀리니 사용하면 안 된다고 계속 강요하다가 반대에 부딪혀서 어쩔 수 없이 표준어로 인정하는 경향성을 보여주기 때문도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널리 사용하고 있는 말을 '틀렸다'고 강요하기 때문이 크겠죠. 저도 맞춤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국립국어원의 일하는 방식을 완전히 옹호할 순 없단 게 좀 슬프군요. ◆ 새로 인정된 표준어
전방위 (2015)
주책이다 (2016)
헛딛다 (2021)
널널하다 (2024)
~길래(~기에) (2011)
~에서야 (2015)
◆ 널리 사용되는 발음법을 인정한 경우
단어기존의 '올바른' 발음새로 인정한 복수 표준 발음
김밥[김밥][김빱] (2016)
불법[불법][불–j] (2017)
효과[효과][효꽈] (2017)
※ 다시 말하면 우측은 2016년 전에는 '잘못된 발음'이었죠. ◆ 외래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올바른' 표준어
외국어 단어기존의 '올바른' 표기새로 인정한 표기
DMZ디엠제트디엠지 (2016)
lobster로브스터랍스터 (2016)
◆ 원래는 '올바른' 표현이었으나 폐기된 표준어 무우 / 상치 / 쌍동이 ◆ 현재 널리 사용되는 '올바르지 않은' 한국어 여지껏 / 좋은 하루 되세요 / 수고하세요 ◆개인적으로 현재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표준어 예시 ※ 아래는 전부 '잘못된' 표기입니다.
몇일살면서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일'이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걸 볼 수 있음.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고친 사람과 고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는데, 한국인의 자연스러운 사고 방식이라든가 보급률로 따지면 '몇일'도 표준어가 되는 게 맞아 보임.
바램바라다(want)는 표준어지만 '바래'는 표준어가 아님. 나는 그걸 바래(X) → 나는 그걸 바라(O). 현재 한국인들이 '표준적'으로 널리 사용하는 쪽은 실재로는 '바래'쪽이며, "나는 그걸 바라"라고 말하면 다수가 어색함을 느낄 정도가 됐음.
돈까스, 닭도리탕 반일 감정에 기반한 억지 논리로 비표준어로 고정 시키는 것으로 보임. 특히 1992년 이래 몇십 년 간 논란이 되고 있는 '닭도리탕'을 보면, 논란의 이유가 '일본어 기원 단어'라는 근거가 없다는 건데, 결국 지금까지도 근거가 없음.
윈도우, 스노우, 레인보우'윈도' 같은 표기가 올바른 한국어. 하지만 w는 영어에서 분명히 입술 모양의 변화를 가져오는 의미 있는 발음(다시 말해 장음이 아니라 실제 독립된 음가가 존재함)인데, 한국어의 외래어 표기법에서 왜 무시하는지 이해가 안 감.
그 외에 수많은 외국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의 이상한 방식들.
표준어를 보고 느끼시겠지만, 사실 국립국어원의 정책은 그리 완벽하지 않아서 표준어 폐지론이 나오기도 하죠. 실제로 표준어가 없는 나라도 꽤 있고요. 국립국어원과 표준어라는 기준이 옳든 옳지 않든, 확실한 것은 저런 기관들은 결국 '관리를 위한 도구'일 뿐이지 언어를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단 겁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영역이 아니죠. 지금 존재하는 다양한 언어들은 아득한 시간 동안 서로 무수한 영향을 끼치며 변화해 왔습니다. 뿌리를 거슬러 보면 서로 달라 보이는 언어도 하나의 그룹에 묶이곤 하죠. '인도-유럽어족'처럼요. 한국어 역시도 고립어로 분류되든 아니든, 중국어와 북방계 민족 언어의 영향을 과거부터 엄청나게 많이 받았단 건 명백합니다. 누가 우위에 있고 지배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교류를 하다보면 그렇게 되게 돼 있어요. (거기에 근대의 일본어는 말할 것도 없죠.) 뿐만 아니라 현대 한국어로 정립되는 과정에서 영어권의 띄어쓰기를 애매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서 아무도 띄어쓰기를 100% 지키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했죠. 심지어 현대의 국어 정책도 의외로 북한말과 일본어에 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요. 언어란 건 결국 사람들이 쓰면서 변하고 주위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고정 불변의 언어는 없어요. 'one of the best'라는 표현이 한국인의 마음에 들어서든, 혹은 못 배운 번역가 탓이든, 결국 널리 쓰게 됐다면 그건 한국어의 일부가 된 거겠죠. 한국어는 황석희 번역가님 말처럼 포용력이 대단한 언어거든요. 웬만한 외국어 표현을 대부분 수용할 수 있습니다.
one of the best
그리고 기존의 '잘못되었다'는 설명도 좀 애매합니다. 예컨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라는 표현이 잘못된 한국어라고 쳐 보죠. 그러면서 'one of the ~'라는 표현을 예로 들면 그럴듯해 보입니다. 하지만 한국어에는 거의 유사한 표현이 이미 있습니다. "우리 애가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 하는 편이거든요"라고 종종 어머니들이 말해 왔죠. 표현 방식이 다를 뿐, '제일 잘 하는 애들 중 하나' 같은 표현은 기존에도 존재했다는 게 재미있습니다. 이렇게 범위를 지정해서 뭉뚱그리는 건 꽤 편리하거든요. 최고가 아닌 이들을 최고의 반열에 끼워넣기에... 엄밀히 말하면 이건 '번역투'보단 단어의 정의와 문법과 실제 사용되는 언어의 규범에 관한 이야기일 겁니다.
しなければならない
일본어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같은 표현도 "해야만 한다"라는 표현과는 명백하게 어감이 다릅니다. 의미는 거의 같지만 표현 방식과 뉘앙스는 확실하게 다르고, 일본어 원문의 어감을 살리기 위해서든 혹은 저 표현이 마음에 들어서 한국어에 편입시키든,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서 널리 쓰게 되면 그게 한국어가 되는 거겠죠. ※ 개인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란 '번역투'를 보급한 일등 공신은 '성문 기초 영문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저는 '번역어투'라는 개념을 처음 듣고서 충격 받았지만, 다시 말하지만 2025년의 생각은 "아무래도 좋다"입니다. 언어는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이고 시대에 맡기면 되는, 우리 모두가 다 같이 사용하고 변화시켜가는 약속이 아닐까요. 사실 지난 몇십 년 동안 한국어는 엄청나게 많이 변했습니다. 가장 크게 변한 건 욕설을 일상어에 많이 섞어 쓰게 됐다는 것이겠지만, 그 외의 어휘나 표현 방법 자체도 정말 많이 변했어요. 아마 90년대나 2000년대의 제가 지금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못 알아듣고 물어보는 표현들이 상당히 많을 겁니다. 꼭 젊은 세대가 만들어내는 '신조어'가 아니라도 말이죠. 비록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저도 맞춤법이 틀리는 걸 상당히 혐오스러워하고, 특히 요즘 사람들이 '바뀌어서'를 '바껴서'라고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쓰고 있는 걸 정말 싫어합니다만^^; 그조차도 만약에 오래 지나서 비표준어 표현이 정착할 경우 그게 표준어가 될 수도 있겠죠. 근데 상식적으로 'ㅟ어'를 'ㅕ'라고 바꾸는 게 말이 되나...
'이제 그만 쉬어 → 이제 그만 셔(?)'
사실 제가 저런 걸 혐오하는 이유는 배움이 부족해서 틀리는 종류라고 생각해서인데, 어쩌면 번역가분들이 말하는 '번역어투' 역시도 배움이 부족해서라고 볼 수도 있을 테니, 관점의 차이나 취향의 차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바껴서'를 좋아할 일은 없겠지만요. 재미있게도 '무우'가 비표준어가 된 거에 분개하는 분들도 있더군요. 지금까지의 얘기와는 별개로, 번역가분들이 '번역어투'를 경계하고 올바른 한국어를 사용하시려고 하는 건 존중한달까 존경합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언어를 바꿔가는 것과, 번역가가 주도적으로 '한국어에 외국어 번역 말투를 집어넣고 변화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일 테니까요. 2025년의 'good mornig'은 '좋은 아침'이라고 번역 돼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만, 1995년의 'good morning'은 '안녕' 혹은 '잘 잤어?' 혹은 '안녕히 주무셨어요?' 같은 식으로만 번역 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번역의 최전선에서 올바른 번역을 하기 위해서 노력하시는 번역가 분들께 기회가 생긴 김에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처음과 다른 의도로 글을 끝맺게 되었네요. 어떻게 보면 번역가분들은 직업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바꿔갈 권리'를 박탈 당한 분들이란 생각도 문득 듭니다.
살다 보니 문득 떠오른
잡담... 2025-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