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팬 연재(1) : 현대 프라이팬까지의 역사
2025년 11월 19일 · 오후 9시 00분
0. 들어가며... 프라이팬은 가정에서 가장 많이 쓰는 기본 조리도구이다. 하지만 막상 무슨 프라이팬을 살지 고르게 되면 종류가 다양하고 의외로 선택이 쉽지 않다. 스텐팬은 좋다는데 어렵고, 코팅팬은 다이아몬드 코팅에 티타늄 코팅에 세라믹에 온갖 신기한 코팅이 즐비하며 건강 논란까지 있다. 요즘은 육각형 벌집 구조팬까지 등장해서 '엄청난 내구도'를 선전하고 있는데 의심스럽다.
프라이팬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기초 조리 도구임에도 전체적인 정리가 의외로 별로 없어 보이기에, 마침 요리가 취미이기도 하니 프라이팬에 대해 한번 얘기해 보고자 한다. 어디까지나 '가정'에서 요리하는 관점에서의 프라이팬이다. 이 연재에서는 크게 - 스텐팬 - 코팅팬 - 하이브리드팬(벌집모양의 육각팬) 이라는 세 종류의 테마에 대해서 다음 번부터 3회에 걸쳐서 다룰 예정이다. 서론이 길었기에 이번 글에서는 가볍게, 편리한 조리도구인 '프라이팬'이 왜 산업화 이전엔 보급이 안 되었던 '현대적 조리도구'인지 얘기해보겠다. ※ 역사 얘기는 글이 너무 짧아서 여흥으로 넣은 거라, 2편이 올라오면 이 부분에 2편 링크를 바로 끼워 넣을 생각이니 넘어가셔도 됩니다. ※ 사실 서론이 지금보다 훨씬 길었다가 줄인 건데, 그렇다고 아래의 내용을 날리기도 뭐해서 1편은 그냥 역사 이야기로 유지합니다. :)
1. 고대에도 프라이팬이 있긴 했다. 소설이나 만화를 보면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떨어진 주인공이 '프라이팬'을 쓰는 장면이 종종 보인다. 음... 뭐 가능할 수도 있는 얘긴데, 솔직히 필자가 보기엔 고증이 부족한 거짓부렁에 가깝다. 프라이팬이 있긴 했다면서 왜 아니라고 하냐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 조리법과는 꽤 다른 쓰임새였다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opper_frying_pan,_5th-4th_century_B.C.,_Thessaloniki_-_Greece.jpg Copper frying pan (patera) dated 5th to 4th century B.C. by Gts-tg, CC BY-SA 4.0 5세기 경 고대 그리스의 구리 프라이팬(tagēnon). 완전히 평평한 바닥은 아닌 걸로 보인다. 참고로 구리의 독성은 염분과 산에 용출되기 때문에 음식과 직접 닿는 '일반 조리도구'론 부적합하다.
서양의 고대에서 중세까지 프라이팬의 조상이 존재하긴 했지만, 현대와 달리 제한적으로 튀김류(혹은 튀김에 가까운 구이법)나 지짐, 혹은 서양식 계란찜 같은 종류의 제한된 방식으로 사용한 걸로 보인다. 또한 로마 멸망이란 사건 때문에, 고대 로마와 중세 게르만 유럽의 조리는 도구에서나 기법에서나 꽤나 차이가 있는 걸로 생각된다. 중세 서양 조리법에는 프라이팬을 활용한 조리법 자체가 그다지 없고, 대부분 냄비, 솥, 오븐 등을 이용한 장시간의 끓이기/로스팅/베이킹 방식이나 직화구이가 주를 이룬다. 프라이팬의 조상이 존재는 했다 정도의 수준이랄까.
화덕으로 보이는 구조물 위에 다시 '불'을 피우고 있고 (까만 알갱이가 숯 같은 연료로 보임), 그 위에 삼발 항아리와 매달린 솥, 그리고 직화 회전 바베큐 구이가 그려져 있다. 본문을 읽으시면 더 이해가 잘 갈 장면이다. 15세기, 독일.
현대 프라이팬 조리는 기본적으로 아래와 같은 특징을 갖는다. ① 현대 프라이팬에 특화된 조리법이란 '평평한 판에서의 고열 가열(시어링=구이)'에 있다. ② 때문에 바닥이 완전히 평평해야 하며 ③ 화력(가열 온도)을 비교적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환경이어야 하고 ④ 한손으로 쥐고서 흔들거나 할 수 있어야 하며 (볶음) ⑤ 조리에 적합한 발연점이 높은 정제 기름이 있어야 한다 이런 조리도구와 환경이 보급된 건 19세기에 들어서이며, 중세까지의 조리는 이런 방식을 지향하지 않은 걸로 보인다. 왜 그랬을까? 한번 추측해 보자.
2. 열원(熱原)과 연료의 문제 (2-1) 난방과 부엌과 연료 전근대 사회에서 '불'이란 건 단순한 편의성이 아니라 생존과 관련된 요소였다. 예컨대 비에 젖었을 때 집에 불이 없다면 폐렴에 걸려서 죽을 수도 있었다.
가스레인지나 석유 난로라는 게 등장하기 전, 그러니까 18세기 정도까지 가정의 '불'은 '탈 수 있는 것'을 실제로 태우는 방식이었다. 나무가 연료로 가장 오래 사용됐고, 근대가 돼서도 석탄이라는 선택지가 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태우는 '땔감'은 굉장히 노동집약적이고 꾸준히 돈이 들어가는 가계의 부담이었다. 특히 중세 이후 유럽 도시들이 끊임없는 '나무 부족'에 시달렸던 걸 보면 더더욱 말이다. 그렇기에 동양과 서양 모두 난방과 부엌이 결합된 형태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궁이와 연결되어 있는 한반도 온돌 난방의 구조 서양 벽난로는 기본적으로 난방이며 동시에 요리용 불이었으며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Rathaus_Rapperswil_-_Innenansicht_-_Ratssaal_2013-04-06_14-30-33_(P7700)_ShiftN.jpg Hinterladerofen im Rathaus Rapperswil by Roland Fischer, CC BY-SA 3.0 유럽에선 주방의 맞은 편 방 혹은 주방의 윗층 방과 연결하여 주방의 불을 라디에이터 난로로 사용하는 방향으로도 발전했다.
(2-2) 주방의 불의 형태 이런 과정에서 동양은 아궁이 형태로 작은 공간에서 고화력의 불을 집중시키는 방식이 됐고, 서양은 벽난로 형태로 더 개방된 공간에서 넓고 약한 불을 지속적으로 태우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아궁이는 거의 닫힌 공간 내부에서 불을 피우며, 위에 타원형 홈을 파서 웍이나 가마솥을 얹는 구조 강한 불이 아래의 중심점을 달구기에 둥근 형태의 웍이 적합하다. 평평할 경우 중심만 과하게 가열되어 조리가 제대로 안 된다.
벽난로는 지속적으로 타오르는 열원 위에 솥 등을 매달거나 직접 조리도구를 올려놓는 구조. 은근한 불에서 멀리서 혹은 직화로 장시간 조리하는 경우가 많고 (위의 그림은 계속 돌리며 회전시키는 꼬챙이에 고기를 꿰서 멀리서 은근히 굽는 바베큐) 빵과 고기를 모두 은근히 조리할 수 있는 오븐 조리도 발달했다.
자연스럽게 동양은 (국물 요리를 제외할 경우) 고화력 볶음 요리를 만드는데 유리했고, 서양은 볶음보다는 장시간 끓이는 요리, 오븐 구이, 직화 구이 같은 형태로 조리 기법이 발전된 걸로 보인다. 특히 서양은 벽난로 형태의 개방된 열원을 주로 사용하면서, 일어서서 허리 높이에서 가열 조리를 하는 환경이 보편적이지 않았던 걸로 생각된다.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Grapen.jpg Medieval pipkins found in Hamburg by Bullenwächter, CC BY-SA 3.0 중세의 조리도구는 발이 달려있어서 장작 위에 그대로 올려두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한손으로 잡고서 조리하기 어려웠다. 매다는 솥 형태가 일반적이었는데 매달린 높이를 조절해서 가열 온도를 조절했다.

3. 제철 기술과 가스 레인지의 보급 (3-1) 평평한 프라이팬을 만드는 것은 어렵다 프라이팬을 만드는 것 자체도 기술적으로 어려웠다. 과거에는 철을 액체로 녹이거나 정제하기 어려웠기에, 적당히 달군 철을 망치로 내리쳐서 형태를 바꾸는 단조 기술로 일상 도구를 만들었다. 평평한 프라이팬은 기본적으로 두께가 균일해야지만 요리가 균일하게 조리된다. 하지만 '완전히 평평하고 균일한 두께의 철판'은 단조 기술로 만들기가 불가능했다. 중심부와 가장자리의 오차가 반드시 생기게 되며, 그 때문에 중심부만이 과열되는 현상이 훨씬 심해진다. (무엇보다 농민/평민 가정에겐 제작 단가가 엄청나게 비싸진다.)
단조에선 평면에 비해 곡면은 만들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보니 동양처럼 둥근 형태로 만들거나, 아니면 '굽기(pan frying)'가 아닌 조리법을 주로 사용하게 됐다. 특히 스테이크처럼 넓은 면적의 재료를 판 위에서 굽기는 어려웠다. 오늘날의 평평한 프라이팬은 철을 녹인 주철(cast iron) 조리도구가 보급되고, 그 후 압연 롤러로 강철괴를 눌러서 펴는 공장제 철판이 나온 다음에나 쓸 수 있게 된 물건이다. 그 시기는 19세기 전후가 되어서였다. (3-2) 가스레인지의 보급과 근대 주방의 진화 무엇보다도 19세기에는 드디어 가정에 스토브(stove), 즉 가스레인지가 보급된다. 드디어 '땔감'에서 해방되고 '난방'과 분리가 된 것이다. 가스레인지의 등장으로 연료를 안정적으로 공급 가능해지고, 작은 불을 넓게 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화력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과거의 '불'은 허리 높이로 함부로 올릴 경우 바람에 날려 화재를 일으키기 쉬웠지만, 가스레인지는 허리 높이의 평평한 공간에서 조리를 하면서도 화재의 위험이 극단적으로 낮아졌다. 이에 맞춰서 평평한 프라이팬을 제조해서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 가스레인지 환경에서는 한손으로 자유롭게 들고 조리할 수 있는 작고 가벼운 조리기구도 사용하기 좋아졌다. 결국 프라이팬 조리가 가능한 주방 환경 자체가 19세기 이후 근현대의 복합적인 산물인 것이다.
결국 현대 가정의 주방은 크고 무겁고 둥근 조리도구에서 벗어나, 작고 가벼운 프라이팬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냄비도 평평하게 바뀌었다. 평평하니 아무데나 두기도 좋고, 가볍고 작으니 청소하기도 좋다. 장작에서 벗어나고 식용유의 발전과 조리 과학 등에 힘입어서 쉽고 빠르게 다양한 조리를 할 수 있다. 천국 같은 환경이다. 프라이팬이란 과거의 모두가 부러워할 놀랍고 사랑스러운 현대의 조리도구이다. 이제 다음 연재에선 본론으로, 가정에서 사용하는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이란 게 대체 어떤 물건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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