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의 작위와 오등작 제도 (1)
2022년 02월 08일 · 오전 7시 16분
유럽의 오등작에 대한 글로 판타지/중세유럽에 대한 글의 포문을 열어 봅니다. 연초(年初)에 설이 지나고 새 분야의 글로 시작한다는 게 나쁘지 않은 느낌이네요 :) 원래 판타지와 중세 유럽에 관한 글은 판타지/무협/SF 라는 세 카테고리 중 가장 나중에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 분야 중에서 누가 봐도 가장 친숙하고 무난한 주제는 역시 오등작(공작/백작/후작/자작/남작의 작위 체계)이 아닐까 싶더군요. 그래서 이걸로 지릅니다. 오늘 이야기는 관심이 있으신 분은 이미 잘 알고 계실 내용일 테고, 게임/만화/소설 등으로만 개념을 접하신 분에겐 꽤 신선한 내용이 될 겁니다. 왜냐하면 오등작이란 건 실제로 유럽에선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약간 깊숙하게 얘기해 보고 싶어서 두 편 정도에 나눠서 씁니다. 1편은 오등작의 기원에 대한 것이고, 2편은 유럽 작위에 대한 본편입니다. 2편으로 되려나? 아무튼 다음 편은 금요일 즈음에 올리겠습니다. 1. 작위(爵位)의 기원 작위(爵位)란 작(爵)의 위계(位階)를 뜻하는 말이다. 여기서 작(爵)이라고 하는 건 본래 고대 중국 씨족사회에서 제사장이나 사제가 의식을 치를 때 쓰던 술잔을 말한다. 아마 살면서 한 번쯤은 사진이나 모형을 보셨을지도 모르겠다. 필자도 어렸을 때 사진을 보고서 "술잔이 정말 신기하게 생겼네. 마시기 참 어려워 보인다."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이미지 출처 : https://zh.wikipedia.org/wiki/%E7%88%B5 중국의 의식용 술잔인 작(爵). 청동기 시대에 이미 존재했다. 본래 술잔이었는지에는 약간의 논란이 존재한다. 초기엔 제물을 희생하는 의식에 쓰였단 설도 있다.
과거에는 제사가 굉장히 중요한 행사였고, 이 작(爵)이란 술잔을 사용하는 권력자들은 언젠가부터 작의 등급을 나눈 작위라는 걸 받게 되었다. 작위는 고대 중국의 국가인 상(商, 기원전 1600년~1046년)대에 이미 존재했다고 전해지지만 입증된 건 아니다. 2. 중국의 작위와 오등작(五等爵) 아무튼 확실한 건, 작위(爵位)라고 부르는 체계는 본래 고대 중국의 시스템이었다는 것이다. 작위는 기본적으로 봉건제에 기반한 시스템이었다. 마치 중세 시대의 유럽처럼 한 지역의 주인을 의미하는 말이었고, 진나라의 중국 통일 이전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각 나라의 제후(諸侯)는 후작(侯爵) 등의 신분이었다. 이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봉건제도가 서서히 사라지면서 작위도 함께 힘을 잃어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형태 자체는 남아서 청나라까지 굉장히 오래 유지되었다. 예를 들어서 삼국지를 보자. 촉나라의 장비의 작위는 서향후(西鄕侯)였는데, 이는 후작(侯爵)을 말한다. 마초는 태향후(斄鄕侯)라는 후작이었다. 마초는 태향후라는 작위와 함께 양주목(涼州牧)이란 관직을 가졌는데, 이렇게 관직과 작위를 함께 부르는 말이 관작(官爵)이다.
이미지 출처 : https://zh.wikipedia.org/wiki/%E5%BC%A0%E9%A3%9E/ 촉한의 후작, 장비.
중국 드라마나 무협소설을 보면, 황제의 핏줄들이 '왕부(王府)'라는 걸 세워서 왕이라고 불리는 걸 볼 수 있다. 이렇게 황제의 핏줄이 '○○왕'이라고 불리는 걸 왕작(王爵)이라고 부른다. 황제가 등장한 후 왕 또한 작위 시스템에 편입되어서 작위의 하나로 변한 것이다. 작위 체계는 시대에 따라 모습을 계속 바꿨다. 주(周)나라 때는 5개의 작위인 오등작(五等爵) 시스템을 가졌으며, 진(秦)나라 때는 20등작제를 가졌다. 그렇다. 우리가 판타지에서 말하는 오등작(五等爵)이란 주나라의 작위 시스템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이건 나중에는 한반도의 고려에도 도입되어 5등작제를 기본으로 한 8등작 체계를 갖췄다. 중국의 작위 체계는 오늘날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아이고 우리 공자님'같은 표현이나 '귀공자'라는 말을 보면. '공자(公子)'라는 표현이 쓰인다. 이 '공자'는 원래 공작(公爵)의 아들(子), 제후의 아들을 뜻하는 말이었다. 시간이 흘러 공작위가 유명무실해지면서 의미가 변하여 '세가집 아들'이란 뜻이 되었고, 현재에는 '지체 높은 집안의 자제'라는 뜻으로 남아 있다. 판타지 소설에서 쓰이는 공자/공녀는 바로 이 '지체높은 집안의 자제'라는 뜻이다. '소공녀'라는 소설도 있지 않나.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저, 『소공녀』 원제 : A Little Princess 이미지 출처 : 예스24(yes24.com)
공작의 공(公) 또한 시간이 흐르며 상대를 높여 부르는 말이 되어서, 중국 무협을 보면 상대방을 성씨+공으로 부르는 걸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유비를 유공(劉公)이라고 부른다거나. 역사극에선 "공께서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오?" 같은 대사도 종종 나오고 말이다. 3. 근대 일본의 화족(華族)과 오등작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진행하며 사민평등(四民平等), 즉 사농공상(士農工商)이 평등한 세상이 되도록 만들겠다고 외쳤다. 하지만 메이지정부는 기존의 신분제도를 폐지하면서 새로운 신분제도를 만들었는데, 그렇게 탄생한 것이 화족(華族)/사족(士族)/평민(平民)의 3계층 신분제도이다. 여기서 화족은 옛 귀족계급의 새로운 이름이고, 사족은 무사계급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사실상 눈 가리고 아웅인 건데, 바람의 검심에 나온 묘진 야히코가 몰락 사족이라는 것도 이 이야기이다. 화족 제도는 1869년 등장해서 구 일본제국 패망 때까지 유지되었다.
필자 기억에'사족'이라고 말한 걸 어디서 봤는데 현재 갖고 있는 96년도판 1권에는 무사라고 번역이 되어 있다. 좋은 번역이긴 한데 대체 어디서 봤을까 설마 영화판인가...
그런데 왜 일본 얘기를 하고 있을까? 바로 유럽의 작위(title) 시스템에 주나라 오등작 이름을 갖다 붙인 걸로 의심되는 가장 큰 용의자가 바로 메이지 시대의 일본이기 때문이다. 메이지 시대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화를 이룩하고, 유럽에 지배당하지 않은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 그리고 동양 문화를 부끄러워하고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자는 풍조가 만들어졌는데,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당시 유행했던 탈아입구(脱亜入欧)라는 슬로건이다. 탈아(脱亜)-후진적인 아시아를 벗어나서-, 입구(入欧)-선진 세계인 유럽 열강의 반열에 들어가자- 라는 뜻이다. '구(欧=歐)'라는 건 유럽을 말하는 한자로, 서양을 말할 때 구미(歐美)라는 표현을 쓰는데 유럽(歐)과 미국(美)을 함께 부르는 표현이다. 그런 와중에 1884년 화족령(華族令)과 함께 화족 계급에 작위 제도가 도입된다. 그리고 예상하신 것처럼 이때 도입된 작위 체계가 바로 공작(公爵) 후작(侯爵) 백작(伯爵) 자작(子爵) 남작(男爵), 즉 주나라의 오등작이다. 정확히는 예기(礼記)에서 작위의 이름만 빌려온 것이긴 하지만. 그리고 이걸 유럽과 교류하면서 영국의 영문 작위명과 동급인 걸로 번역했다. (공작만 예외로 duke로 함)
일본에서 정한 유럽의 작위에 대한 번역명. 참고로 가장 위에 있는 건 대공(大公)이다. 대공작의 준말이려나(...) 출처 : 위키피디아(https://ja.wikipedia.org/)
이게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판타지 물에 등장하는 '유럽의 작위'를 말하는 명칭이 된 시초로 보인다. 정확히 '이것 때문에 그렇게 됐다'라는 자료를 보지는 못했는데, 근대에 번역을 하면서 처음 이 체계를 잡은 게 일본이고, 신뢰도가 높은 건 아니지만 공후백자남 명칭의 기원이 근대 일본이란 얘기를 일본 쪽에서 한 걸 예전에 스쳐가며 한 번 본 기억이 난다. 애초에 아시아 최초로 근대화를 이룩하고 서양 학문을 받아들이면서, 서양권에서 쓰는 대부분의 영어 단어는 일본에 의해서 한자 단어로 번역됐다. 예를 들면 주식(株式, stock), 과학(科学, science), 진화(進化, evolution), 낭만(浪漫, roman/romance) 같은 웬만한 근현대적 개념의 번역어는 거의 다 일본이 만든 단어다. 그리고 이후에 동아시아 전체로 퍼졌고. 그런 점에서 볼 때 서양의 공후백자남 작위 번역을 일본이 퍼트렸다는 용의자 설은 제법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아마도 처음 유럽 작위명을 번역하며 고민하던 사람들은 중국의 고대 작위 시스템과 유럽의 작위 시스템이 제법 비슷한 것'처럼 보이는 걸' 발견했던 것 같다. 그리고서 도입한 명칭이 뿌리 깊게 자리잡아 현재 동양권의 거의 모든 일반인들이, 특히 판타지, 소설, 게임, 만화 등의 분야에서는 유럽 작위가 공후백자남인 걸로 알고 있는 것이고. 그런데 문제는 실제 유럽의 작위 시스템은 공후백자남 오등작 시스템과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나 '중세 유럽'이란 시대, 그것도 '유럽 전체'라는 영역에는 더더욱 다르고 말이다.
(2부에 계속)
* 추신 : 노파심에 남기는데, 여기서 일본 가지고 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 공개된 장소에선 기본적으로 중립입니다. 홈페이지의 평화를 지켜주세요. 제가 올린 내용에 대한 중립적인 글은 괜찮습니다.
2022년 2022-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