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등작에 이어서 대공(大公) 이야기도 해 봅니다. 대단한 공작이라는 대공...
원래 1부 2부 구분 없이 하나로 썼습니다만, 분량을 줄일까 아니면 2부로 나눌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둘로 나눴습니다. 나눈 김에 설명을 약간 늘려서 보충도 해 보았네요.
1부에서는 대공으로도 번역되는 '프린스(Prince)'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2부에서는 대공으로 번역되는 그 이외의 작위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오늘 수요일에 1부가 올라갔고, 2부는 3일 후인 토요일에 올리겠습니다.
1. 21세기 판타지 창작물의 대공
판타지 소설에서, 특히 로맨스 판타지에서 아주 강력한 귀족의 작위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바로 대공(大公)이다. 큰(大) 공작(公爵)이란 뜻인데, 공작보다 하나 위의 작위를 끼워넣은 참으로 직관적인 등급명이다. 황제의 아래, 공작의 위. 공후백자남 오등작의 위에 서 있는 위대한 귀족! 판타지 소설에서는 크게 두 가지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아래와 같다.
(1) 왕국이나 제국의 틀 안에 있지만 자치권을 인정받은 (대)공국의 군주.
(2) 공작의 위, 왕/황제 아래의 가장 높은 작위. 이 경우 공국의 왕이라는 포지션은 잘 드러나지 않음.
일반적으로 남성향 판타지에서는 (1)의 모습을 많이 보여 주고, 로맨스 판타지(이후 '로판')에서는 (2)의 모습을 많이 보여 준다. 이유는 남성 판타지는 보통 전쟁이나 전투를 다루고, 로판은 보통 왕실 안에서의 인간관계에 집중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남성 판타지는 보통 최종 도달점이 (걸림돌을 다 죽인 후) 본인이 왕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어디까지나 경향적인 얘기다.)
그러면 현실에 존재했던 대공과 비교하면 어떨까? 사실 (1)과 (2) 모두 그럭저럭 맞아들어간다. '중세'로 한정할 경우 (1)이 더 맞는 말이긴 한데,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하며 (2)도 대충은 맞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말하면 단순해 보이지만, '대공(大公)'이라고 번역된 작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대공'은 역사 속의 여러 종류의 작위를 전부 하나로 묶어서 부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Erzherzog/Archduke, Grand Duke, Fürst, Prince 모두 '대공'으로 번역이 된다. 오늘은 이 중에서 가장 판타지 속 '대공'에 가까운 프린스(Prince)에 대해 알아보자.
2. 역사 속의 대공 : 프린스(Prince)
시대를 중세(5~15세기)라는 틀 안에만 놓고 보면, '대공'이란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지위는 프린스(Prince)다. 현대에는 주로 '왕자'라고 번역되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단어인데, 사실 유럽에서도 혼란스러운 단어이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Prince란 작은 땅의 군주이기도 했고, 왕실의 자손이기도 했고, 귀족의 지위이기도 했다.
이제부터 한번 알아보자.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
1513년 출간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원제목은 『II principe』이다.
영문으로 번역된 제목은 『The Prince』.
(2-1) 프린스 Prince 의 기원과 공국
프린스(Prince)는 본래 라틴어의 프린켑스(prīnceps)에서 기원한 말로, '제 1인자'라는 뜻이다. 로마 제국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칭호였다.
중세 시대에는 원래 왕은 왕인데 왕(King)이라고 하기엔 뭔가 좀 부족한 군주의 칭호로 사용돼서, 작은 땅의 군주를 프린스(Prince)라고 불렀다. 중세 말이 되기 전의 프린스는 사실상 '작은 영토의 왕' 혹은 주권(sovereign)을 가진 군주/봉신이란 뜻이었다. 앞서 말한 '자치권을 인정받은 공국의 군주'에 가까운 뜻이다.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
오랑주 공국(principauté d'Orange).
1163-1713
이렇게 자치권을 가진 군주(Sovereign Prince)가 다스리는 땅을 Principality/Princedom라고 불렀다. Principality를 보통 '공국(公國 : 공작의 나라)'이라고 번역하고, 통치자인 Prince는 대공이나 공작으로 번역한다. 오등작 번역이 너무 편하게 갔다는 이유가 이런 혼란을 야기해서다. Duke도 공작이고 Prince도 공작이라니.
대부분의 공국 - 작은 영토들은 중세 초중기에 왕국에 통합되었고, 상대적으로 왕정에 가까운 영국과 프랑스 지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연합체의 성격을 띤 신성로마제국의 경우는 계속해서 상당수가 남아 있었다. 특히 공작(Duke)이 통치하는 공국(Duchy)이나 백작이 통치하는 백국(County/Earldom) 등도 Principality의 개념 안에 혼용되는 편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면 공국의 숫자는 더 늘어난다.
(2-2) 고위 귀족의 호칭, 혹은 작위의 이름
시간이 흐르면서 작은 지역의 지배자(Prince)들은 봉건 체제 하에 왕을 중심으로 묶였고, 군주라기보단 신하에 가까워졌다. 그러면서 프린스(Prince)에는 '작은 군주'와 '고위 귀족'의 의미가 섞이게 된 것 같다.
그러다보니 프린스가 대략 '높으신 분' 같은 뜻으로 고위 귀족을 부르는 호칭처럼 되었다고 한다. 상대를 '~공(公)'이라고 높여부르게 된 중국의 공작(公爵)의 변천과 꽤 비슷한데, 결국 왕이란 존재가 자신 이외의 최고 권력자를 용납하지 못하다 보니, 중국의 공작이든 유럽의 Prince든 원래의 지위를 잃은 게 아닐까 싶다.
이미지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Edward_II_of_England
영국 최초의 웨일스 공(Prince of Wales), 에드워드 2세
작위 체계에 편입되면서 프린스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말이 됐다. 예컨대 가장 유명한 프린스(Prince) 작위인 영국의 웨일스 공(Prince of Wales)은 13세기 말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를 정복하며 잉글랜드에 흡수됐다. 이후 웨일스 지역에서 계속 프린스를 자칭하며 반란이 지속되자, 1301년 아직 왕자였던 에드워드 2세에게 정식으로 웨일스 공(Prince of Wales) 작위를 수여했다.
이런 시대적 변화에도 많은 작은 독립국의 지배자들은 여전히 전통에 따라 스스로를 프린스라고 불렀다. 그러기에 '작위로서의 프린스(대공/공작)', '작은 영토의 통치자', '높으신 분'의 뜻이 전부 한 단어 안에서 혼용되었다.
(2-3) 차기 왕위 계승자의 호칭, 왕의 아들, 그리고 후계자
이런 상황에서 유럽에는 새로운 전통이 생겨났다. 바로 차기 왕위 계승자로 확정된 왕자가 특정한 영지의 작위를 물려받는 관습이 생겨난 것이다. 그 대표격인 영국의 웨일스 공(the Prince of Wales)은 14세기 중엽부터는 왕의 후계자(Crown Prince)만이 받는 작위가 됐다.
이 전통이 만들어지고서 프린스(Prince)란 단어에 '군주'나 '작위명'이 아닌, '왕위 계승자'라는 뜻이 새롭게 생겨난다. 후계자가 계속 프린스 작위를 독점한 결과였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자 일반적인 왕자 역시 프린스라고 불리며, 오늘날 가장 유명한 뜻인 '왕자'가 됐다.
* 이미지 출처 https://www.princeofwales.gov.uk/
* 문제가 될 경우 말씀주시면 삭제합니다.
현(現) 웨일스 공(the Prince of Wales). 영국 왕위 계승자 1위 찰스 왕자.
1343년 흑태자 에드워드부터 차기 왕위 계승자의 독점 작위가 됐다.
이제 새로운 혼란이 생겨났다. 왕위계승자가 갖고 있는 작위, 예를 들어서 the Prince of Wales는 '웨일스 공'이라는 공작위이다. 그런데 이걸 갖고 있는 사람의 신분 호칭은 '왕자(Prince)'이다. 프린스(왕자)가 프린스(공작) 작위를 갖고 있는 것.
여기에 더해 왕정 시대의 유행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왕족이 아닌 일부 고위 귀족의 후계자들도 Prince 작위를 받는 유행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들 역시 프린스로 불리게 된다.
한편 신성로마제국의 사정은 약간 달랐다. 독일어에서는 왕자(Prinz)와 군주(Fürst)를 구별해서 사용했다. 독일어 Fürst는 어원이 Prince와 같았고, 영어의 공작(Prince)에 대응하는 번역어로 사용됐다. 중세 말 즈음부터는 Fürst가 제국의 정식 작위 체계에 편입된다. 공작(Herzog)보다 아래이며 백작(Graf)보다 높은, 황제의 봉신에게 주는 작위였다.
(2-4) 귀족의 호칭이 된 프린스
중세가 끝난 17세기에는 프린스의 뜻이 더욱 진화했다. 프린스(Prince)가 고위 귀족에게 수여하는 호칭(style)의 하나가 되었고, 이 호칭 역시 후계자에게 상속되는 경향을 보이게 됐다. 이게 유행이 되어서 고위 귀족의 후계자를 부르는 관습적 호칭이 됐다.
이런 변화는 중국에서 '공자(公子)'란 말이 '지체 높은 집안의 아들'이라고 변해간 것과 참으로 흡사하다. 오늘날 쓰는 '아이고 우리 왕자님'과도 비슷하고 말이다.
이미지 출처 : https://wappenwiki.org/
Chimay 공국(Principality of Chimay)의 문장(Coat of Arms).
맥주로 유명한 Chimay는 벨기에에 위치한 오랜 공국이기도 했다.
1486년 County에서 공국(Principality)으로 승격했다.
결국 프린스(Prince)는 본래 작은 군주였으나, 고위 귀족의 작위이도 했고, 황제와 왕의 아들, 고위 귀족의 아들, 높으신 분을 부르는 호칭 등이 되었다. 영어에서도 이게 참 헷갈리기에 오늘날 보면 Sovereign Prince, Crown Prince, Royal prince, Courtesy prince, Ruling prince 같은 수식어가 종종 붙는다. 사실 이래저래 이야기는 했지만 결국 프린스는 '군주'라는 의미에 가장 가까웠던 것 같다. 고위 귀족이든 왕족이든 결국 '군주'라는 존경의 의미에서 파생된 뜻이니 말이다.
2.5. 1부를 마치며 : 프린스와 판타지의 대공
프린스는 참 혼란스러운 단어다. 안 그래도 뜻이 많은데 오늘날 '왕자'라는 뜻이 너무 유명하며, 마찬가지로 여전히 유럽에 프린스 작위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프린스는 군주라는 의미였고, 자주권을 보장받은 영토를 다스리는 봉신이기도 했으며, 정식 작위 체계에 들어온 고위 귀족의 작위이기도 했다. 판타지 소설에서 사용되는 '대공'은 이런 Prince가 원형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지역별로 보면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프린스(Prince)라는 작위가 왕족에게 독점되는 경향을 보이며 공작(Duke)보다 위에 있는 작위였다. 항상 차기 왕위계승자가 작위를 물려받고 실질적인 통치권은 없는 경우도 있어서, 영토가 나중에 왕자의 가문으로 분리되어서 독립할 위험도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이나 동유럽, 이베리아반도 쪽에서는 작은 땅의 통치자로서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제국의 작위에 편입된 Fürst의 경우 황제의 봉신으로서, 공작(Herzog)보다는 낮지만 백작(Graf)이나 변경백/후작(Markgraf)보다는 높은 작위였다. 제국은 연합체였기 때문에 Fürst가 제법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한다.
의미가 계속 변하고 더해진다
군주로서의 프린스(Prince)가 항상 '대공'으로 번역되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어떨 때는 '공(작)', 어떨 때는 '대공'으로 번역되며, 번역가들 사이에서 통일이 안 되어 있다. 프린스란 말 자체가 워낙 경우의 수가 많기도 하고 말이다. 오등작과 대공의 번역 체계는 일본이 첫 단추를 완전히 잘못 끼운 느낌이다. 너무 쉽게 가려고 했달까. 특히 지금 시대에는 이걸 굳이 한자어로 번역을 해야 하나 싶다.
'대공'으로 번역되는 작위는 몇 개가 더 있는데, 2부에서 이어서 소개하겠다. '큰 공작(大公)'이라는 번역어가 탄생한 이유가 되는 작위들로 보인다.
[ 2부에 계속... ]
# 부록. '대공'은 아니지만 프린스 : 교회의 프린스
프린스가 사실상 '군주'라는 뜻이었다 보니 교회령을 통치하는 성직자를 Prince of the Church라고도 말했다. 실제로는 Prince 뒤에 교회의 계급을 붙였다.
예를 들면 신성로마제국의 주교령을 통치하는 성직자를 주교후(Prince-Bishop, Fürstbischof, 主敎侯)라고 불렀다. 번역명이 재미있다. 종종 후작으로도 번역되는 퓌르스트(Fürst)와 급을 맞춰서 주교-후작이라고 말한 것일까? 대주교의 경우 대주교후(Prince-Archbishop), 수도원의 경우 수도원장후(Prince-abbot, Fürstabt)이라고 불렸다. 여기에 영지의 이름이 붙어서, 아우크스부르크 주교후(Prince-Bishop of Augsburg), 켐프텐 수도원장후(the Abbot of Kempten) 같은 식이 된다.
유럽 전역에 존재하기는 했으나, 앞서 얘기한 세속 프린스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신성로마제국을 중심으로 존재했다. 독일은 이렇게 분산되어 있는 힘이 모이질 않아서 근대까지 고생을 한다.
* 참고로 Fürst는 Prince의 번역어로서 '공작'으로 자주 번역되는 경향이 있는데,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공작(Herzog)의 아래 작위이기 때문에 '후작'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래서 Reichsfürst를 '제국공'이라고 번역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국후'라고 번역하는 사람도 있고, 같은 논리로 Prince-Bishop을 '주교후'라고 번역하는 사람도 있고 '주교공'이라고 번역하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