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며...
이전 연재에서 교회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세 번 정도는 이야기한 것 같다. 중세라는 시대가 기독교에 엄청난 영향을 받고 있었단 사실을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늘은 중세 교회와 중세인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겠다.
중세의 교회를 많은 분들은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종교 단체'라고 생각하실 것 같다. 그런데 중세인의 삶을 파고 들어가 보면 교회는 종교 단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국가 행정기관에 가까웠다.
중세엔 국가나 종교라는 개념 자체가 지금과 달랐다. 국가는 왕 개인의 소유물이었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귀족이 아닌 대다수의 사람에 관심이 없던 시대에 민생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선 교회였다.
1. 교회와 서유럽
4세기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통치 영역에 교회들이 본격적으로 세워졌다. 그 후 5세기에 로마 제국이 멸망했다. 제국은 멸망했지만 교회는 남았다. 통치력을 잃어버린 땅의 여러 종류의 행정 사안은 교회를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로마 멸망 최후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이었다. 서유럽 전역에 수많은 게르만 일파가 퍼져서 각자의 세력을 만들었다. 대부분은 멸망했으나 프랑크 왕국은 9세기까지 성세를 이루며 우리가 아는 '중세 유럽'의 기틀을 만들었다. 프랑크 왕국이 그럴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기독교를 꼽는다. 프랑크 왕국을 세운 클로비스가 기독교로 개종하며, 교회 세력과 민중의 지지를 얻고, 로마의 문화 역시 빠르게 흡수한 것이다.
권력자와 교회는 중세가 시작하는 단계부터 서로를 이용했다. 프랑크 왕국은 교회의 재산을 이용해서 권력의 기반을 다졌고, 교회는 권력의 틈으로 파고 들며 교리를 전파했다. 결혼 제도와 가족의 형태를 바꾸었고, 각지의 전통과 풍습을 기독교의 것으로 바꿨다.
7세기 스페인 지역에서 왕을 축성하여 신성화하는 전통이 부활했고, 8세기 프랑크 왕국에서도 피핀이 축성을 받으며 왕권을 신성화시키는 전통을 부활했다. 이로써 서유럽의 왕은 신성한 명분을 얻었고, 교회는 자신들을 지킬 방패를 얻었다.
8세기 말, 샤를마뉴 대제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수도원들을 일종의 행정기관으로 삼아서 대규모 개혁을 감행했다. 프랑크 왕국 최대 성세였던 이 시기를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프랑크 왕국 멸망 후, 교회는 황제 임명권을 주장하며 서유럽 전체에 영향력을 넓혔다. 모든 사람은 기독교인이고, 모든 국가는 기독교 국가였다. 이로써 우리에게 익숙한 중세 유럽이 시작됐다.
이후 교회는 역동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또 겪었다. 9세기까지 게르만 전통을 대부분 기독교화시켜서 우리가 생각하는 '중세 유럽'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권력자의 틈에서 부패하기도 했으나, 10세기부터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개혁이 벌어졌다. 그 이후 '교황권'이 확립되고서 굉장히 빠른 속도로 영향력을 키웠다. 12세기 전후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강해졌고, 민생의 전반에 관여하게 됐다. 이런 변화의 역사를 자세하게 다루진 않을 것이다. 이후 말하는 중세의 교회는 이렇게 영향력을 넓인 이후의 이야기이다.
2. 중세인의 일생과 기독교
모든 중세 유럽인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인이었다. 갓 태어난 신생아인 상태에서 세례를 받아 기독교에 입교했고, 죽을 때까지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죽음 이후까지도 신에게 의탁을 했으니 말 그대로 모든 것이 기독교의 테두리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럼 중세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기독교적 인생’을 살았을까?
(2-1) 탄생
아이가 태어나려고 하면 귀족이나 기사는 조산사, 의사, 성직자를 불렀다. 중세의 성직자는 당시 의료의 일부를 담당하기도 했고, 임산부와 아이를 위해 축복하고 기도를 할 수도 있었다.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면 보통 당일에, 혹은 며칠 안에 약식으로 세례를 했다.
아기가 가능한 한 빨리 세례를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는데, 이유는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을 경우 착한 불신자가 가는 얕은 지옥인 림보(Limbo)에 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으면 무조건 지옥에 간다. 당시의 유아 사망률은 매우 높았기에 약식으로나마 빠르게 세례를 했고, 이제 아기는 며칠 안에 죽더라도 지옥에 가지 않게 되었다.
※ 세례가 이루어지는 구체적 시기, 방법 등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산모는 출산 후 약 40일 간 집 안에서 휴식을 취했는데, 집 밖으로 나가면 불행해질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 후 교회에 가서 탄생에 감사를 드리고 신의 축복을 받는 의식을 치른다. 세례식 역시 정식으로 성대하게 열렸다. 이 때 아이는 처음으로 이름을 받았다. 벌거벗은 아이를 물에 완전히 담근 후 성향유(聖香油)를 바르고, 입에 소금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흰색 세례복을 입혔다.
이미지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Baptism
동방정교회의 세례
세례식에는 하객들과 대부, 대모가 참석했다. 대부의 숫자는 부모의 지위에 따라 늘어났다. 세례식의 마지막에는 대부모가 아기를 위해 신앙 고백을 했다. 이제 아기는 기독교인(모든 중세 유럽인) 커뮤니티에 소속되었다.
오늘날 평가하기를 대부와 대모 같은 시스템을 통해서, 교회는 피로 이어진 전통 가족을 약화시키고 기독교도를 한 가족으로 비유하며 영향력을 넓혔다고 평가한다. 처음에는 잘 모르고 시작했겠지만, 전통적 가족의 형태를 기독교적 가족으로 바꾸려는 집요한 노력은 확실한 성공을 거뒀다.
아이는 이후 7세가 되면 다시 견진성사를 받았다. 이런 풍습은 지역마다 시기마다 조금씩 달라진단 걸 참고하자.
(2-2) 결혼
교회는 로마 시대(4세기)부터 결혼에 관여하고자 했고, 수백 년에 걸친 노력 끝에 결국 일부일처제와 근친혼 금지를 정착시켰다. 결혼식은 교회의 성사의 하나로서 편입됐다. 이런 성과가 어느 정도 나온 것이 약 8세기 전후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중세 유럽'의 모습이 약 8~10세기부터 시작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사제가 주관하는 결혼식은 10세기 무렵부터는 제법 흔해졌고, 12세기에는 사회의 일반적인 결혼식이 됐다.
이미지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Marriage_in_the_Catholic_Church
사제가 주관하더라도 결혼식이 꼭 교회에서 열릴 필요는 없었다. 귀족의 경우 사제가 동참한단 전제 하에서 원하는 장소에서 결혼식을 열었다. 교회에서 결혼식이 열릴 경우에는 교회의 안이 아니라 교회의 문 앞에서 진행되었다.
이때 사제는 신랑과 신부에게 결혼에 동의하느냐고 묻는다. 이건 기독교가 가져온 굉장히 중요한 변화인데, 가문의 결정이 아니라 (여성을 포함한) 당사자간의 합의가 없으면 결혼은 무효라는 이야기였다.
※ 물론 이것은 종교계의 이론적인 이야기로, 세속 권력과 종교는 이 문제로 계속 부딪혔다. 하지만 교회의 이런 의견이 결혼 제도를 점진적으로 매우 크게 바꾼 것은 확실하다. 또한 기독교는 이 문제에 있어서 여성을 포함한 개인의 이의를 교회 법원을 통해 들어주거나 도피처를 제공해줄 수 있었다.
또한 오늘날에도 남아 있듯이 "이 결혼에 이의가 있는 자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데, 결혼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 결혼식에 반대할 이유가 있는지를 참석자들에게 묻는 절차였다. 무사히 결혼식이 완료되면, 신랑과 신부는 교회 안으로 들어가서 결혼 미사를 보았다.
이혼 역시 교회의 주관이었다. 교회가 이혼 심사를 맡은 이후로 이혼은 중세 초(5세기) 게르만식 결혼에 비해 매우 어려워졌다. 이유는 남녀가 결합해서 하나의 단위를 이루는 것은 신의 섭리이고, 인간 사회의 (불륜 같은) 사소한 이유 따위는 신의 뜻으로 결합된 신성성을 파괴할 사유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혼식 자체가 성립 단계부터 잘못된 거라는 수준의 이유, 즉 애초에 신성함이 인정되지 못했단 게 아니면 이혼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것 때문에 왕과 교회가 수백 년 동안 엄청나게 다투기도 했다. 결국 영국 성공회가 분리된 것도 이 문제 때문이다.
(2-3) 1년이란 생활 주기와 기독교
중세 사람들은 살면서 1년 간의 생활 주기를 교회력(Liturgical year)의 종교 축일에 맞춰서 살았다. 신분에 따른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교회력에 따른 중요한 종교적 절기를 간단히 보면 아래와 같다.
대림절과 성탄절, 사순절, 부활절은 교회 절기에서 굉장히 중요하고 1년 중 큰 의미를 가진 시기였다. 전부 합치면 대략 5달 정도의 긴 시기인데, 이 시기에 종교 행사만 하면서 보통 사람들이 일을 안 하고 노는 건 아니고 지켜야 하는 것들이나 해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가장 유명한 사순절(Lent)은 금식과 기도, 금욕 등을 행하던 시기로 유명하다. 이론적으로 40일 동안 ‘모든 사람’은 금식을 해야 했으며, 노약자 등은 예외로 쳤다. 여기서 금식이란 고기와 유제품을 먹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하루에 한 끼는 생선, 채소, 달걀, 맥주 등을 먹는 게 허용됐다. 이 시기를 사람들은 상당히 힘들어 했다고 한다.
1215년 4차 라테란 공의회 이후 '모든 사람'은 적어도 1년에 한 번 부활절엔 영성체를 받는 것이 의무로 규정되었다. 영성체는 미사 중에 성직자가 축성한 빵을 받는 의례이다. 미사에서 빵과 포도주는 예수의 살과 피를 상징한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사람'을 파악했을까? 중세의 교회는 행정기관의 역할을 했고, 교회 미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곧 지역 거주자 명부이자 신분의 증명이기도 했다.
(2-4) 축일, 축제, 성인의 날
중세에는 일 년 중 거의 매달 한 개 이상의 축제가 있었다. 예컨대 1월의 주현절, 2월의 성 발렌타인 데이, 3월의 카니발, 4월의 부활절, 5월의 오월제, 6월의 세례 요한 축일, 7월의 가르멜 산 성모 축일, 8월의 성모 승천 대축일, 9월의 미카엘마스, 10월의 할로윈, 11월의 위령의 날, 12월의 크리스마스 등등...
지역마다 시기마다 축제는 다를 수 있다. 수많은 축제가 이교도 기원임은 둘째로 대개의 축제들은 기독교화되었다. 지역의 (기독교적) 수호자나 성자들의 날도 있었다. 중세의 농민들은 따로 생일을 챙기지 않았는데, 자신이 태어난 날과 가까운 기독교 성인의 날 다 같이 생일을 축하했다고 한다.
중세의 축일은 1년에 60일 이상이었다고도 하는데, 시기마다 지역마다 다를 순 있었겠지만 확실한 건 현대인보다 훨씬 공식 휴일이 많았다. 교회에서 지정한 휴일 역시 매우 많았으며, 어떤 시기엔 100일 이상을 쉬는 시기도 있었다고 한다. 괜히 현대인이 역사상 가장 많이 일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2-5) 고해성사, 회개, 순례
1215년 이후 고해성사 역시 1년에 한 번 반드시 해야 하는 행위로 규정됐다. 이는 주임신부의 감독 하에 행해졌는데, 교회는 사람들의 죄를 고백 받는 것으로 신자의 마음에 파고들어 도덕적인 지배력을 발휘하게 됐다. 긍정적으로 보면 민심을 관리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도움을 줬다.
참고로 이런 의무들을 행하지 않을 경우 신자는 살아서는 교회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죽어서는 (기독교식으로) 땅에 묻히지 못하게 됐다. 교리적으로는 고해하지 않는 죄가 있을 경우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종교 활동과 관혼상제를 관장하는 교회의 영향력은, 비록 간접적이더라도 엄청나게 강력해졌다.
한편 고해와 회개는 별개였다. 회개는 성소에 가서 성유골에 기도를 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는데, 가까운 성소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유명한 성소에 순례를 가길 원하기도 했다.
중세의 순례는 매우 흔한 것이었으며, 일반인들도 평생에 최소한 한 번은 하길 원했다고 한다. 순례자를 위한 길과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멀고 먼 순례길을 가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가까운 곳이라도 찾아갔다고 한다. 순례를 하는 이유는 기도, 회개 등 여러 이유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성물의 힘으로 병을 치료하기 위함도 있었다.
(2-6) 죽음
종교가 가진 가장 강력한 보상은 사후 세계의 구원이다. 기독교 역시 전통적으로 죽음 후 구원 받아 신의 곁으로 갈 수 있을 거란 교리를 내세웠다. 죽음은 아주 오래 전부터 종교의 영역이었다.
그 사람이 종교적이었든 아니었든, 죽음이 가까워지면 대부분 종교를 찾았다. 권력자와 기사는 대부분 교회에 묻혔다. 교회를 건축하기도 하고, 재산을 기부하기도 했다. 말년을 수도원에 들어가서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죽어가는 사람은 사제와 함께 마지막 의식을 치렀다. 이를 임종기도(the Commendation of the Dying)라고 한다. 먼저 마지막 고해성사를 치르고, 종부성사(Extreme Unction)를 치르며 몸에 성유를 바르고 기도한다. 그 후 사제가 성체를 가져다 주고서 마지막 영성체인 노자성체(Viaticum)를 치른다. 이는 혼자 외롭게 죽는 게 아니라 영생을 약속한 예수가 죽음의 순간 함께 할 거란 의미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에게 대단한 위안을 줬다고 한다.
이미지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Anointing_of_the_Sick_in_the_Catholic_Church
가난한 농민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장례는 교회의 주관이었다. 기독교인이 아니면 (모두가 원하는) 장례식을 치를 수 없었다. 사망 후 30일이 지났을 때 장례식을 열렸다. 그 후 매년 죽은 자를 기렸다. 사후에도 수도원과 교회에서 죽은 자를 기리는 미사가 꾸준히 열렸는데, 그 중엔 사후에 연옥에서 고통 받는 기간을 줄여달라는 의미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유족들이 의지하게 되었다.
부록. 왕과 권력자, 그리고 파문
종교가 강력했던 시대에 '신의 이름'과 '신이 부여한 권리'는 중요한 대의명분이었다. 중세에 '왕'이란 단순히 힘이 강력한 지배자를 뜻하는 게 아니었다. 신이 권한을 부여한 정신적인 지도자였으며, 도유식을 통해서 신성이 부여됐다. 교회의 축복이 모두가 반대하는 자를 왕으로 만들기는 힘들었겠지만, 모두가 지지하는 자조차도 신의 이름 없이는 완전한 왕이 될 수 없었다.
왕의 신성은 '병을 치유하는 왕의 손'에서 잘 드러난다. 중세에서 근대에 이를 때까지, 사람들은 왕의 손에 닿으면 병이 낫는다는 기적을 믿었다. 왕들은 적게는 매년 몇 명 정도부터 많게는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을 '만졌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병에서 나으면 왕의 손을 통해 신성이 발휘된 것이고, 낫지 않으면 병자의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다. 강력한 권력자의 혈통만을 따지는 게 아니라, 신이 인정하고 부여한 신성 자체를 따진 것이 중세 유럽의 왕이다.
이미지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Royal_touch
병자를 만지는 루이14세.
교회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파문(Excommunication)이었다. 위에서 우리는 교회가 개인의 인생에 관여하고 관혼상제를 주관하는 것을 봤다. 파문이란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축출된단 의미이다. 파문을 당하면 결혼, 장례식 등 교회가 주관하는 거의 모든 성사를 받는 것이 금지된다. 법적 계약이 모두 무효로 여겨지고, 채무를 받을 수도 없으며, 고용되지도 못하고, 심하면 대화까지도 불가능해졌다.
군주가 파문당할 경우 신하들은 충성 서약을 회수하고 공격할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 말하자면 파문당한 사람은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인 보물 고블린처럼 변한다. 물론 현실이 이론처럼 '파문당했네? 공격!' 하고 즉각적으로 돌아서는 건 아니지만, 파문을 당하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위태로운 상태에 처하게 됐다.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교황과의 서임권 분쟁으로 파문(1076)을 당한 후, 결국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던 카노사의 굴욕(1077)은 매우 유명한 사건이다. 굴복한 이유는 황권이 흔들리고 반역 모의가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것으로 금지령(Interdict, 성무 금지)이 있다. 이것은 특정 지역 전체에서 성사를 금지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결혼도, 장례도, 그 무엇도 행해지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금지령을 불러온 자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과 분노는 하늘을 찌르게 된다. 영국의 왕 존(1166-1216)은 금지령과 파문을 당하고서 6년을 버티다가 결국 교황에게 굴복했다. 참고로 세례 같은 정말 중요한 의식에는 예외를 뒀다고 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파문이 형벌이나 협박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파문당했다고 기독교인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며, 참된 회개와 화해로 인도하는 방법이란 것이다. 참 재미있는 핑계이지만, 이 핑계는 파문의 약점이기도 했다. 파문당한 사람이 용서를 빌면 교황은 명분적으로 파문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파문은 직접적이고 영구적인 무기가 되진 못했다.
이것도 먹히지 않으면 교회는 최후의 수단으로 '저주'를 했다. 저주를 받으면 영혼이 사탄에게 공식적으로 양도된다. 흥미롭게도(?) 교황 보니파키우스와 성전기사단장 자크 드 몰레의 저주를 받은 프랑스 카페 왕가는 왕 자신과 왕의 세 아들, 손자가 6년 동안 연달아 죽으면서 혈통이 단절되었다.
[2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