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재속 성직자(Secular clergy)와 수도사
민생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잠시 수도원에 대해서 살펴 보자. 중세 기독교에서 수도원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대체 교회와 수도원은 뭐가 다를까?
재속(在俗) 성직자란 속세에 있는 성직자란 뜻이다. 즉, 성당의 신부처럼 일반인에게 공개된 교회에서 세속에 관여하는 종류의 성직자들을 말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주교, 주교 등의 로마 가톨릭 사제들이 그들이다.
한편 수도사라는 존재가 있다. 이들은 속세를 등지고 종교 생활에만 전념하고자 하는, 마치 불교의 출가 승려 같은 사람들이다. 수도사를 뜻하는 몽크(monk)의 어원은 '외롭다/혼자(alone/solitary)'를 뜻하는 그리스어 monos/monakhos에서 왔다. 원래 초기 수도원은 수도사가 세상을 떠나서 고립되어 종교 생활만을 하기 위한 장소였을 뿐,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종교시설이 아니었다. 남자 수도사를 수사(monk)라고 하고, 여자 수도사를 수녀(nun)이라고 한다. 출가해서 세상을 등진 걸로는 수녀가 현대인에게 더 익숙할 것 같다.
이미지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Cluny_Abbey
클뤼니 수도원.
종교 사회였던 만큼, 재속 성직자든 수도사든 사회에서 높은 지위와 영향력을 가졌다. 당시의 성직자들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권력자의 조언가이자 실무 행정관으로서 큰 힘을 휘둘렀다. 교회는 권력자들 사이에서 분쟁을 중재하기도 했다.
대주교나 주교는 영지를 다스리며 왕이나 고위 귀족과 맞먹는 수준의 영토와 재산, 권력을 갖고 있었다. 반대로 수도사들은 수도원에서 공동 생활을 하고 살며 사유재산을 갖지 못했다(하지만 수도원은 영지와 재산이 있었다). 재속 성직자는 여러 단계의 강력한 계급으로 묶여 있고 소속과 명령 체계가 있었지만, 수도원은 수도원/수도회 내부의 계급은 있을지언정, 대외적으로는 수도원장의 위로 교황 밖에 없었다.
수도사들은 이론적으로는 세상을 등지고 종교에만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실제로 부패할 대로 부패했던 교회가 10세기 경 스스로의 힘으로 개혁해서 엄청난 성장을 거뒀는데, 이 개혁을 가져온 것이 바로 수도회였다.
수도회는 10세기 이전에는 여기저기에서 각자 도생하는 경향이 컸지만, 클뤼니 수도원이 등장한 이후 마치 프랜차이즈의 본사처럼 '수도회'라는 연결망을 이루면서 수도원 왕국을 건설했다. 수도원은 위로는 교황만이 있었으며 재속 사제들의 통제를 받지 않게 됐다. 이로써 중세 교회는 대주교와 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교구 집단과 수도회라는 독립적인 집단을 거느리게 됐다. 수도원은 가장 이상적인 기독교적 삶의 모델이었다.
수도회는 ordo/order라고 쓰는데, 이는 수도원 종교 공동체의 단위이다. 이 단어는 십자군 이후론 기사단(order)을 뜻하게도 된다. 여기서 판타지의 ‘기사단’이 역사적 고증을 따르지 않는 단체임을 엿볼 수 있는데, 나중에 기사(knight) 파트를 연재할 때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4. 교육기관으로서의 교회와 수도원
과거엔 공교육이 없었다. 하지만 중세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은 존재했는데, 바로 교회였다. 교회 학교는 매우 오래 전부터 존재했고, 8세기 샤를마뉴 대제 때는 모든 주교구와 수도원은 학교를 열라는 법을 만들기도 했다.
교회 학교는 11세기 무렵에는 체계적인 조직을 이루었다. 이것은 교회에게 엄청난 힘을 주었는데, 중세의 (거의) 모든 책은 성직자의 손으로 쓰여 지고, 모든 교육이 성직자에 의해서 행해진다는 것이었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교회가 원하는 가치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고급 교육을 받은 많은 자들이 다시 성직자가 되었다.
중세의 교회 학교로는, 성가 학교와 수도원 학교, 대성당 학교, 문법학교 등이 있었다. 간단히는 노래나 읽고 쓰기부터, 문법, 수사학, 변증학, 산술, 기하학, 점성술 등을 배웠다. 참고로 중세 시대에 ‘글’이란 기본적으로 라틴어를 읽고 쓸 수 있는지를 말한다. 문법 역시 라틴어 문법이다.
중세의 대표적 교육과목인 자유 7과(Liberal arts).
이런 학교에는 보통 부유한 자만이 다녔다. 대부분의 가난한 자들, 농민들은 애초에 본인들이 배우기를 원하지 않았다. 일반 가정에서 아이들은 7살 무렵부터는 가정의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중요한 일손이었다. 또한 학교에 간다는 건 생산 활동을 포기하고 먼 곳에 나가 따로 살면서 몇 년 동안 생활비를 소모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무료 교육 기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자들은 거의 교육을 받지 않았다. 결국 근현대에 와서 '의무' 교육을 제정하고 싫다는 사람들을 강제로 학교에 보낸 것이 현대 교육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귀족이나 매우 부유한 자, 기사가 되길 원하는 자제들 역시 학교에 잘 가지 않았다. 그들은 집에서 가문에 상주하는 성직자나 가정교사 등을 불러서 개인 교습을 받거나, 아니면 다른 귀족의 아래에서 기사의 길을 걸었다. 가정교사의 교육은 교회 학교에 비해서 학문보다는 귀족으로서의 몸가짐과 소양 등에 더 맞춰져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중세의 거의 모든 교회에 부속 학교가 있었을 정도로 충분한 수요가 있었다. 특히 성직자가 되길 원한다면 반드시 교회 학교에 갔을 것이다. 당시 성직자는 사회 최고위 계급이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며 다른 종류의 학교도 생겨났지만, 이번 연재는 기독교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생략하겠다.
5. 의료를 담당한 교회와 수도원
중세에는 의사가 거의 없었다. 보통 사람은 평생 '진짜 의사'를 한 번도 구경조차 못했다. 사실 중세 유럽에는 제법 많은 병원이 있었지만, 그 대부분에 전문적인 의사는 없었을 것이라 말해진다. 많은 경우 나병 환자를 수용하는 수용소였고, 가난한 자나 노약자의 수용소이기도 했다.
그런 의료 공백의 큰 부분을 담당한 것이 바로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은 로마 시대에 이미 서양 최초의 병원들을 세우며 의료의 한 축을 담당했다. 8세기 무렵에는 여기저기 수도원 부속 병원들이 생겨났는데, 의료 수준은 높지 않았으나 현대 병원 개념에 매우 근접했고, 헌신적으로 환자를 돌보았다. 오늘날 병원을 뜻하는 단어 호스피탈(hospital)은 원래 ‘손님을 받는 곳’이란 뜻이며, 종교 순례자를 머물게 하는 숙소에서 시작한 것이 오늘날까지도 ‘병원’이란 단어로 정착한 것이다.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는 예수.
성경에는 예수가 병자를 치료하고 기적을 일으킨 많은 일화가 있기에
교회 역시 일찍부터 의료에 참여했다.
수도원은 중세 의료의 중심이었고, 기사들이 싸우다가 다치면 일반적으로 수도원을 찾았다. 수도사들의 의료 행위는 십자군 원정에서도 빛났다. 11세기에 만들어진 구호기사단(Knights Hospitaller)은 십자군 원정지에서 구호 활동을 했다. 이들은 16세기에 스페인 관할 몰타로 이주하고서 몰타 기사단(the Order of Malta)이란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하지만 1163년 투르 공의회에서 교회가 피를 혐오한다는 교의가 만들어진 후에 성직자들은 더 이상 외과 수술을 할 수 없게 됐다. 여전히 중요한 의료 기관이긴 한데, 수술은 못하게 되었으니 외과 기술이 더욱 낙후되는데 일조했을 것 같다. (참고로 당시의 전문적인 '의사'는 기본적으로 내과 의사였다. 동양의학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한편 재속 사제들 역시 치료 활동을 했다. 병자성사(Anointing of the sick)는 병자의 몸에 성유를 바르고 기도문을 외워 회복을 기원하는 성사이다. 환자를 축복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활동도 있었다. 부유한 귀족이 의사를 부를 때도 먼저 성직자를 부른 후에 의사가 치료를 했다. 중국의 도교처럼 성직자가 기도나 퇴마 의식을 해서 병을 치료하려고 하기도 했다.
6. 구호 활동
중세에는 가난한 사람이 많았다. 사회 전체의 생산량이 오늘날과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낮았다. 기후에 민감했고, 흉작이 들면 굶주려야 했다.
왕실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법을 제정하고 구휼을 위해 노력했지만, 가까이서 꾸준히 민생을 돌본 것은 교회와 수도원이었다. 특히 11세기 클뤼니 수도회는 찾아오는 가난한 모든 이들에게 매일 예외 없이 빵 1파운드와 포도주를 주었다. 구휼을 위해서 수도사들이 그만큼 단식을 해서 식량을 마련하기도 했다. 시토 수도회 같은 다른 곳들도 꾸준한 구휼 활동을 했다.
기독교는 자선이란 용어를 일찍이 이주 초기의 게르만족에게 전파했다. 자선의 대가로 가난한 자의 진심 어린 기도를 요구했는데, 이는 천국으로 향하는 중요한 티켓으로 여겼다. 죽은 자의 기일에 자선 활동을 해서 저 세상까지 도달하는 진심 어린 구원의 기도를 모으기도 했다.
교회에서는 10세기부터 구빈원(Almshouses)을 운영해서 가난한 자, 노인, 병자를 돌봤다. 교회와 수도회의 병원 역시 구빈원 기능을 겸했다. 기독교는 아니지만 길드에서도 조합원과 그 가족을 돌봤다. 부유층들이 고용인의 노후를 돌보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고아 역시 중세 시대에 교회와 수도원이 감독했다. 수도원에선 아이를 거두어 키우다가 일정 나이가 되면 노동자나 견습생으로 보내서 독립시켰다.
7. 교회재판소
중세의 법정은 가장 큰 규모의 왕실 법정(Royal court)부터 가장 작은 규모의 장원 법정(Manorial court)까지 다양했다. 그 중에서 종교적인 영역을 다루던 것이 바로 교회 법정(Ecclesiastical court)이다.
원래는 교회와 성직자, 신자, 신앙 등에 관한 문제를 다뤘는데, 교회의 힘이 커지고 민간의 성사(聖事)에도 깊게 관여하면서, 자연스럽게 결혼과 이혼, 죽음 등의 세속적인 문제까지 다루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의 전성기에는 현대의 가정 법원 비슷한 모습도 보이게 된다. 죽음 이후는 교회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유언장이나 상속 등에 관련된 문제도 교회 재판이 담당했다. 고리대금업자가 죽으면 그의 재산을 압류해서 빚을 진 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교회의 신명 재판은 오늘날까지 악명이 대단하다. 달군 쇠를 몸에 대거나 묶고서 물에 빠트리는 등의 시련으로 재판을 하는 것인데, 신이 무고한 자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에서 행해졌다. 하지만 이 재판이 중세 내내 행해진 것은 아니다. 이르면 11세기 무렵엔 많이 사라졌다. 최종적으로 교회가 선호한 방식은 오늘날처럼 피고가 선서를 하는 재판이었다.
비슷한 이름의 종교재판소(Inquisition)는 다른 곳인데, 여긴 이단을 색출하고 심문하는 무서운 곳이다. 12세기 말 처음 등장해서 기독교 내부의 반대 세력을 전부 제거했다. 13세기 중엽에는 고문을 공식적으로 허용하면서 지옥문을 열었다. 지동설 지지자들이 재판 받은 곳도 바로 종교재판소였으며, 19세기 초에 나폴레옹이 폐지시킬 때까지 악명을 떨쳤다.
8. 도피처, 유배지로서의 수도원
어떻게 보면 중세 유럽에서 권력자들이 수도원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방법이 바로 유배지로써의 수도원이다. 수도원은 세상을 등진 곳이다. 마치 동양에서 절로 출가해서 속세를 떠나는 것처럼, 많은 중세 사람들은 수도원에 투신하거나, 투신당했다.
예컨대 기사의 자녀가 몸이 약할 경우 어릴 때 그냥 수도원으로 보냈다. 이유는 어차피 기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힘이나 재산, 권력이 없는 과부 역시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후계자 경쟁에서 패배한 가족도 죽음 대신 수도원으로 갔고, 결혼하지 못한 딸이나 재산을 나눠주기 힘든 귀족의 자식 역시 수도원으로 보냈다. 어떤 경우엔 원치 않는 결혼을 피하기 위해 수도원으로 가기도 했다. 그야말로 유배지이자 도피처라고 할 수 있다. 동양에서 왕위 경쟁에 패배한 형제들이나 죄인을 절로 출가시키는 게 떠오른다.
하지만 수도원으로 핏줄을 보내는 것이 꼭 유배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귀족의 자식 중에선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원장의 지위까지 오른 이들도 많다. 권력을 위해 수도원에 자식을 보내는 귀족들도 많았다. 수도원장은 수도원이란 세계의 왕에 가까우며, 수도회의 장은 계열 수도원 전체를 지배하는 대단한 권력자였다. 수도사 출신의 교황도 있다.
노후에 자발적으로 수도원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은퇴한 기사가 수도원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재산을 기부하고 수도원에서 종교 생활을 하다가 구원받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마땅히 의지할 곳이 없어서일 수도 있었다.
9. 마치며...
중세의 교회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봤다. 사실 교회는 언급한 것 이외에도 정말 다양하게 사회에 영향을 끼쳤는데, 전부 다루지 못해서 아쉽다.
중세의 미흡한 사회 시스템의 모자란 부분을 보충한 곳이 교회였다. 중세의 교회는 왕의 행정부보다도 훨씬 체계화된 조직이었다. 중세의 삶에서 교회는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도 떼어 놓을 수 없다.
'자칭 중세 판타지'를 주장하는 거의 모든 판타지 세계 설정은, 교회라는 중요한 요소가 빠진 가짜 중세라고 할 수 있다. 판타지 소설의 국가는 고도로 체계화된 현대 국가에 가까우며, 과거에 그런 국가는 없었다. 시스템과 자원이 있다면 애초에 왜 봉건제가 나왔겠는가.
교회는 중세인의 삶과 함께 했고, 모든 지역 모든 곳에 있었다. 작은 마을이라도 거의 모든 곳에 동네 교회가 있었으며, 연재에서 소개하지 못한 면모 역시 많다. 중세인의 인생 전체와 하루하루 삶의 방식에 관여했고, 관혼상제, 축제, 휴일, 복지, 의료, 구빈, 교육, 재판, 행정 등 시스템이 부재한 온갖 분야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다.
높게는 왕과 귀족부터 낮게는 농노에게까지, 상담자이자 조언자이며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사회의 도덕윤리 규범에 영향을 끼쳤다. 사소하게는 결혼제도와 가족생활부터, 크게는 전쟁의 향방까지도 교회가 관여했다. 예컨대 중세에 자잘한 전쟁이 너무 많아서 '신의 평화' 기간을 정하고서 일 년 중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전쟁을 못하게 한 것 역시 교회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 기간이 100% 지켜지지 못하더라도 그게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고의 차이는 크다.
권력자들에게는 '처리가 곤란한 인간'을 처리하는 유배지로서도 매우 유용했다. 가난한 귀족의 자식들, 재산을 주기 싫은 자식들, 권력 경쟁에서 패배한 귀족, 결혼을 못한 귀족들은 전부 수도원으로 출가시켰다. 일단 가면 보통은 다시 못 돌아온다. 수도원의 권력이 강할 수도 있겠지만, 속세의 권력과는 범주가 달라지기 때문에 더 이상 피 튀기는 경쟁의 대상은 아니었다.
교회는 지역마다 영향력이 달랐다. 일찍부터 기독교로 개종했던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기반으로 하는 나라들, 즉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에서는 귀족보다 우위인 사회의 정점이었다. 하지만 그 외의 주변부에서는 영향력이 작아졌다. 이것은 영국이나 다른 국가들이 프랑스와 다른 정치, 사회적 특징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사실 이번 교회 연재는 첫 글을 쓴 게 거의 세 달 전이었다. 도교 연재를 하면서 같이 썼던 글이다. 교회의 여러 면모를 소개하고 싶어서 공을 들이다가 (결국 연재 전체가) 계속 미뤄진 글이었는데, 몸 상태도 그렇고 이래저래 타협하게 된 것 같아서 아쉬움이 남는다. 교회가 관여한 일은 너무 방대해서 다 정리하기가 애매하기도 하고 길기도 하고 쩝.
아무튼 교회는 단순한 종교 기관이 아니었다. 중세에 없어서는 안 될 행정 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세 교회가 사회에 기여한 역할을 생각하면, 십일조란 것도 '아무 것도 안 하면서 뜯어간 나쁜 것'만은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참고로 십일조는 원래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부양하기 위한 금액이었다고 한다.
이미지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Cluny_Abbey
클뤼니 수도원.
중세의 대표적 교육과목인 자유 7과(Liberal arts).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는 예수.
성경에는 예수가 병자를 치료하고 기적을 일으킨 많은 일화가 있기에
교회 역시 일찍부터 의료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