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는 안 보는 주의이지만, 화제의 '명량'을 보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치열한 백병전이 나온다길래 까려고 봤습니다.
그리고 결론은 (고증 문제와는 별개로)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정말 별로인 영화였습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이 영화가 별로라고 생각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완성된 영화라기보단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호소하는 팬 필름이다.
또 하나는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능력을 깍아내리기만 하고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이 후의 내용은 영화 내용에 관한 치명적인 누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제대로 된 영화인가?
제 개인적인 소견입니다만, 영화는 한 편으로 하나의 완성된 작품입니다. 2시간 정도 되는 런타임 동안 그려내고 싶은 이야기를 압축해서 집어넣고, 자연스럽게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이야말로 영화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간혹 2시간 안에 수 년에서 수 십년의 시간을 멋지게 표현해내는 작품들을 보면 스토리와는 별개로 감탄을 하곤 하죠.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이라는 인물을 기본적으로 알고 있고 좋아한다는 가정 하에서나 볼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모르는 외국인에게는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일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관객이 알아가고 몰입해나갈 시간을 짧은 나레이션이로 대체하고, 고민하고 갈등이 고조되는 부분부터 이야기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장군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전혀 모르는 캐릭터가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비장함에 휩싸여서 결전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일 것 같아요.
물론 긴 전쟁에서 특정한 전투를 떼어내서 다루는 작품은 많이 있지만, 그런 작품들도 도입부에 적절한 소개와 몰입할 시간을 준다는 점은 다르지 않습니다. 명량은 부하들의 반항과 심각한 전황 속에 이순신이라는 캐릭터를 갑자기 던져놓습니다. 이순신을 잘 모르는 사람이 영화를 보면서 상황이나 고뇌하는 모습은 이해를 해도, 과연 저희가 생각하는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를 갖고 애정을 가질 수 있을까요? 영화의 전반부가 이순신의 고뇌에 초점이 맞추어진 만큼 지루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 마치 이순신 장군의 팬이 이순신 장군의 팬들을 위해서만 만든 작품이라는 느낌입니다. 보는 내내 동인지나 팬소설을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정도 느낌을 받을 거라곤 예상하지도 못했네요.
2) 뛰어난 전략가 이순신 장군의 능력을 제대로 표현했는가?
사실 재해석을 한 영화에서 백병전이 나오냐 안 나오냐가 왜 이슈가 될까요? 단순 고증 문제라면 더 쉽게 넘어갔겠지만, 이 문제는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관련이 된 부분이기 때문일 겁니다.
삼국지의 제갈량이 돋보이고 회자되는 이유는 승리보다는 격을 달리하는 군사였기 때문일 겁니다. 이순신 장군이 역사에서 특별하게 돋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임진왜란에서의 활약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시대를 앞 선 전술전략가이자 지휘관이었기 때문일겁니다.
이순신 장군은 일개 장수가 아닌 뛰어난 지휘관이자 전술전략가였습니다. 유리한 전장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영화에도 어느 정도 표현이 되었죠. 하지만 이것이 전부라기엔 너무 약하다는 생각이 드시지 않나요?
같은 적을 같은 군대와 무기를 갖고 상대해도 누가 지휘관이냐에 따라서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명량해전의 승리가 이순신 장군의 지휘 때문인 것은 칠천량 해전의 결과를 통해 잘 알 수 있죠. 하지만 영화에서 포커스를 맞춘 것은 홀로 분전하는 이순신과 그를 보고 두려움을 그 놈의 '용기'로 바꾸는 아군입니다.
물론 사기는 전쟁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당시의 사기가 바닥이었던 것은 사료를 보면 예상할 수 있죠. 그런데 문제는 사기가 올랐다고 12척이 100~300척의 적을 상대할 수 있었는가...란 이야기입니다. 영화에선 장렬한 전투에 아군의 사기가 오르자마자 갑자기 승리분위기로 가는데, 통솔력은 보여줄 수 있었을지 몰라도 역사에 남을 전략가로서의 능력은 글쎄요. 전쟁은 사기와 용기로 이기는 게 아닙니다.
백병전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순신 장군의 시대를 앞 선 함포 집중 사격은 아군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적군의 약점을 공략한 역사에 남을 전술 전략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포격전 위주의 압도적인 전투를 하며, 다가온 약해진 적을 소탕하는 장면을 원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죠.
그런데 철저한 원거리 포격전이 아니라 영화처럼 치열한 선상 백병전을 했다고 쳐봅시다. 영화와 똑같이 싸워서 이겼다고 쳐봅시다. 여기서 어디에 '세계 최고의 수군 제독'으로까지 말하고 싶어하는 '격을 달리하는' 이순신 장군의 전술 전략이 있었다는 걸까요?
오히려 승기가 보이는 데도 멍청하게 바라만 보는 300척의 왜군 전함. 함포전이 적의 장기인 걸 아는 데도 달랑 한 척 제발 도착하라고 보내는 화약선. 12척의 판옥선이 몸통 박치기로 돌격해온다고 도망가는 300척의 배... 왜군이 일부러 져준다는 느낌입니다. 한 예로 선봉 2진이 대장선과 싸우고 있을 때 구루시마 본진이 출진해서 지원을 했다면 대장선은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겁 먹고 멀리 있던 아군이 그걸 보고 지원하러 왔을리가 없구요.
포격전이 재미가 없다고 생각한 건 그렇다고 칩시다. 단지 그럴거면, 그걸 보충할 이순신 장군의 '격이 다른' 다른 전술 전략을 생각했어야죠. 재미를 위해서 이순신 장군의 최대의 장점을 없애버리는 것은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폄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단순한 무력/지휘력이 뛰어난 장수, 충성스러운 장수, 불굴의 정신을 가진 장수가 아닙니다. 격이 다른 빼어난 지장이자 전술 전략가였습니다. 영화는 이걸 표현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 결론...
이 영화는 명량해전의 진수도, 이순신 장군의 진수도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끊임없이 관객의 감정에 호소하면서 장렬히 싸우고 왜군에게 승리하는 장면만을 보여주었을 뿐이죠.
솔직히 영화보는 내내, 이 감독이 자기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캐릭터에 스스로 도취되어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물론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안 보면 되는 영화긴 하지만. 이런 영화가 이렇게까지 이슈가 된다는 것은 그저 애국심, 민족 감정 때문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씁쓸하네요.
감독의 전작인 '최종병기 활'을 보며 많이 아쉬웠지만, 딱히 깊이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명량'을 보니 적어도 이순신 장군은 이 감독의 역량으로 다룰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정말 별로였으며, 이 감독의 사극 판타지는 앞으로 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덧. 처음에 '고증'이란 단어를 언급해서 하는 말입니다만. 솔직히 전 정확한 고증을 꼭 따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이 작품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