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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상자


Category List admin  
크루세이더 킹즈에 대한 오해
 

간혹 인터넷에서 크루세이더 킹즈(Crusader Kings, 이하 크킹)에 대한 글이랄까 밈을 볼 때가 있다. 대략 '사상 최악의 막장 게임' 정도로 소문이 퍼져 있는데, 그런 게임이 아니다. 지금까진 인터넷이 그러려니 했지만, 최근엔 웹소설을 통해서도 저런 이미지가 널리 퍼지는 것 같아서 팬으로서 이야기를 조금 해 보고 싶어졌다.



이 게임 300시간 한 것 정도론 '뉴비' 취급이지만...
누군가에겐 충분히 긴 시간이기도 하다.


크루세이더 킹즈는 '스텔라리스'로도 유명한 패러독스(Paradox)라는 회사에서 2012년에 발매한 유럽 중세 왕조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사실 게임이라고 할 수 있는지 약간 의문이 드는데, 이 게임은 특정한 목표가 없다. 그저 중세의 영주나 왕으로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두고서 서기 1066년부터 1452년이라는 중세 후반기 기간 동안 생활, 혹은 생존을 하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은 게임보단 솔직히 '시뮬레이터'에 가깝다. (이후엔 편의상 '게임'이라고 부르겠다.)



하지만 크킹은 중세의 정치와 외교, 법을 포함한 귀족의 삶을 게임 속에서 단순화시키면서도 타협할 수 있는 역사와 설정 고증을 해냈다. 아마 중세에 대해서 알기 시작한 사람은 이 게임을 하는 것만으로 중세 유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영지의 군주로 태어나서 결혼을 하고 자손을 보고 영지를 운영하면서 세월을 보낸다. 그리고 죽고 후계자로 플레이어를 하고서 다시 삶을 이어나가는 방식이 반복된다.

그 안에서 어떠한 달성 목표도 존재하지 않으며, 게임 오버의 조건은 '군주의 혈통이 단절되었을 때', 그러니까 군주로서의 가문이 끊겼을 때이다. 예를 들어서 딸만 있고 아들이 다 죽으면 높은 확률로 게임오버라고 보면 된다.

그에 비해 '게임 클리어'는 1452년이 되었을 때이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든 아무 상관이 없다.



가문의 혈통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게임 최대의 목표라면 목표다.


아무튼 이게 전부인 게임인데 문제는 이 게임은 자유도가 높으면서도 매우 불친절하다. 튜토리얼은 거의 없다시피 하면서 할 수 있는 행동이 너무 많다. 행동 커맨드도 일관성이 없어서 게임을 100시간쯤 해 보면 '아 이 게임이 어떤 건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든다. 200시간쯤 해 보면 '아 이제 제대로 한 판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란 느낌이 든다.

이런 불친절함과 엄청난 자유도로 인해서, 많은 수의 게이머가 입문 과정에서 떨어져 나가고, 300시간 쯤 게임 한 걸로는 '뉴비' 취급을 받게 된다.



게임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행동에 비해서 인터페이스가 휑한데
특정 부분에서 우클릭을 해야 나오는 메뉴도 있고 초보자 입장에선 숨겨져 있다.
그게 곧 입문 난이도로 연결된다.


그런데 왜 이 게임이 '막장 패륜 게임' 같은 이미지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걸까? 그건 게임 안에서 중세 귀족이 할 수 있는 웬만한 행동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흔한 예를 보자. 일반적으로 이 게임은 처음엔 '땅따먹기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과 혼동된다. 게이머들은 영토 확장을 원한다. 문제는 이 게임은 중세 시대 고증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명분이 없으면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며, 행동을 막하면 파문을 당하고서 모두의 적이 되어 멸망한다. 신하들은 다들 자기 영지가 더 중요해서 병사를 공급해주기 싫어한다. 전쟁 비용도 엄청 든다.

이런 문제를 딛고서 간신히 영토를 확장하면 더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바로 게르만 전통의 '분할 상속제도'다. 자식들에게 가진 영지를 골고루 분할해서 나눠주던 사랑과 애정의 이 전통은 실제로 중세 권력자들에게 심각한 고민을 안겨줬으며, 게이머에게도 고민을 안겨줬다.

몇 십 시간을 고생해서 땅을 먹어봐야, 부모의 인생이 끝나면 땅이 자식 숫자만큼 분할되고서 자기는 그 중 하나만을 이어받게 되는 거다. 다른 형제들은 바로 옆에 이웃하는 경쟁자 NPC가 된다.

땅이 작으면 작은대로 욕이 나오고, 땅이 크면 큰대로 더 욕이 나온다. 그 모든 역경을 넘어서 진짜 힘들게 땅을 얻었더니 조금 지나면 자동으로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중세 상속법을 모르면 1회차 플레이어는 당하기 전까지 이걸 모른다.



요런 작은 영지 몇 개도 분할상속제 아래에선 자식 숫자로 나뉜다.
큰 제국 역시 마찬가지.


실제 중세 유럽에서는 이 문제를 수백 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해결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세 서유럽을 거의 통일했던 카를 대제의 프랑크 제국은 3분할이 되면서 사실상 멸망했다.

하지만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들이 그런 '점진적인 노력과 시행착오'를 거치기를 원할까? 진성 롤플레이어(역할 연기자)라면 그렇겠지만, 꽤 많은 플레이어들은 더 쉬운 방법을 선택했다. 바로 자식을 한 명만 빼고 다 죽이는 것이다.



군주권을 지키고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 암살이나 처형은 정말 쉬운 선택이다.
위의 스샷은 아마 적국 포로를 죽였던 기록이었던 것 같다.
웬만한 건 다 할 수 있는 게임.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나온다. 중세는 평균 수명이 짧았고 병에 걸리면 쉽게 죽었다. 전염병도 주기적으로 돈다. 자식이 잘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고, 아들이 태어나는 것 역시 50%의 확률이다. 심지어 태어난 아들이 지능이 떨어지거나 기형이거나 하는 특히나 '군주로서의' 여러 문제를 안고 있을 수도 있다. 이게 게임에 다 반영이 돼 있다.

그러니까 일부 게이머들은 역시 쉬운 방법을 택했다. (안 해 봐서 잘은 모르지만) 예컨대 불륜 상대를 여럿을 두고서 사생아를 많이 낳는다거나. 그 후에 자기가 죽기 직전까지는 자식 숫자를 유지하다가, 죽을 즈음이 되면 제일 멀쩡한 애 하나를 남기고 다 암살해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기본적으로 군주와 혈통과 가문에 관한 게임이다.
서로 죽이란 게 아니라 알아서 가문을 잘 관리하는 게임이란 것.




이런 짓(?)을 하다보니 다른 짓은 더 쉬워진다. 예를 들어서 옆 동네 군주의 부인과 불륜을 한 다음에 애를 낳게 한 후, 다음 대가 되었을 때 혈통 명분을 따지면서 공격하는 거다. 전쟁이 반드시 명분이 있어야 가능하고, 땅을 새로 얻기가 힘들기 때문에 음모와 모략과 부도덕과 패륜을 기본 전제로 깔고 플레이를 하는 방식이 인터넷에 널리 퍼졌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다. 예컨대 필자의 경우 게임을 하면서 가족을 죽이거나 불륜을 하지 않는다. 그 결과가 뭐냐면 아래 스크린샷을 보시라. 크킹2를 해 보신 분은 저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아실 거다.



후반부에 좀 슬슬했더니 정복하지 못한 땅이 있는 게 아쉽다.
하지만 다시 하진 않고 유로파4로 세이브를 계승해서 이어갔다(?)

아, 참고로 유로파나 빅토리아는 대량 정복이 사실상 막혀 있기 때문에,
크킹2에서 인도 북부 현 중국 영토까지 먹어두는 게 HOI까지 이어갈 때 편할 것 같다.
세계 정복을 하고 싶다면 말이다(...)


영국 내부를 절반 정복하는 것도 어려운 게 이 게임이지만, 운과 컨트롤이 잘 맞아 떨어지면 위와 같은 땅 따먹기도 가능하다. 저기까지 하고서 필자는 두 번 다시 저런 컨트롤을 하기 싫어서 게임을 접었지만 말이다. 가끔 시간이 나면 다시 해 보고 싶어지긴 한다.

혹시 위의 스샷이 궁금해 하실 분들을 위해 말씀 드리자면. 알렉산더의 혈통을 위조하는 이벤트가 성공한 후, 컨트롤로 사실상의 중앙 집권 상태를 유지하고서 모든 권력을 독점한 채 끝없는 군사 컨트롤을 하면 가능하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예비 부대를 잘 운용하는 게 포인트다. 작위 역시 공작급은 전부 회수한 후 파기해 버리고서 부하가 그런 거대 권력을 쥐지 못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 이상적으로는 남작급 귀족만 존재하는 게 제일 좋다. 신하들의 호감도 역시 끝없이 관리를 잘 해 주면 진압 가능한 반란만 일어나는 상태로 흘러간다. 자식의 경우 상속 제도를 바꾸기 전엔 그냥 아들 하나만 낳고 죽지 않기를 기도했다.



이 게임은 잘 만든 '중세 역할 연기 시뮬레이터'다. 매우 다양한 행동을 할 수 있으며, 어떤 행동도 시스템이 제지하지 않는다.

실제 중세의 부모들은 자식이 죽으면 미치고 따라죽기도 했다. 가족과 사랑은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보편적 가치이다. 단지 게이머는 그걸 게임이기 때문에 쉽게 무시하고서 패륜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고, 그건 게임을 하는 사람들의 문제이지 게임의 문제가 아니다.


필자도 위의 유라시아 정벌을 하기 전에는 그냥 평범한 군주로서 태평성대를 펼쳐서 성자로 등극하길 원한다거나, 가문 업적을 세워 본다거나, 아내랑 자식이랑 알콩달콩 지내고 여행 다니고 하면서 평범한 군주 생활을 보냈다.

시뮬레이터는 자기가 만든 소소한 목표를 유지하고 달성하면 되는 것이지, 시뮬레이터 자체가 패륜이나 정복 행위를 강요하진 않는다. 항공기 시뮬레이터를 하면서 승객 태우고 바다를 향해 돌격하는 건 플레이어의 취향이지 게임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크킹 특유의 불친절함과 어려움이라는 높은 장벽은 대다수의 사람들의 진입을 막아버렸고, 그 상태에서 인터넷에서 떠드는 소수의 패륜 컨셉 게이머들이 퍼트리는 글이 자극적이니, 어느 순간부턴 게임 자체가 그걸 위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사람들이 착각을 하게 됐다. 실제로 저 게임을 '패륜을 하기 위해서' 플레이하는 사람도 들어 본 적이 있다.


지금까지 게임을 해 본 사람은 다들 알 법한 당연한 얘기를 했지만, 좋아하는 게임이 이상한 이미지로만 퍼지는 것 같은 게 아쉬워서 팬으로서 변호를 좀 해 봤다. 게임 자체는 중립적인 시뮬레이터이고, 게이머가 그런 선택을 했을 뿐이며, 특히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소소하게 일상을 보내기만 해도 충분히 재밌는 게임이란 걸 말해 보고 싶었다. 누가 저 게임이 패륜 게임이라고 말하면, 그걸 말하는 사람이 그런 컨셉 플레이를 즐긴다고 보시면 된다.





사실 크킹 개발사의 가장 큰 문제는 게임을 DLC로 완성시키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건데, DLC 좀 적당히 내고 크킹3나 어서 완성시켜(...) 주면 좋겠다. 아, 참고로 현존하는 시리즈 최고 명작인 크킹2는 아마 스팀에서 무료로 풀려있을 거다. 1~2년 쯤 전 기준으론 '아직'은 크킹3보다 크킹2가 낫단 느낌이었다.


Game| 2024-04-22 15:00:00 | [Comment(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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